기획·연재

[오늘의 경제소사]1863년 리치먼드 빵 폭동

남북전쟁 후 만성적 식량난



1863년 4월2일 오전9시 미국 남부 도시 리치먼드. 총과 돌을 든 주부 수백 명이 거리로 나섰다. 순식간에 3,0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상점을 부수고 털었다. 북부와 전쟁이 한창인 상황, 초기의 우세가 호각지세로 바뀐 와중에 남부동맹의 수도인 리치먼드에서 빵 폭동이 일어난 이유는 단순하다. 식량 부족.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갖고도 면화만 재배했던 남부는 개전 직후부터 먹거리 부족에 시달렸다. 해외에서 식량을 사려고 시도했으나 경화(금을 기반으로 주조한 화폐)가 떨어진데다 북부의 해상 봉쇄로 반입 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리치먼드의 식량 사정은 특히 나빴다. ‘부유한 버지니아주의 주도’였던 시절, 즉 전쟁 직전 3만8,000여명이던 인구가 남부동맹의 수도로 지정되며 10만명으로 늘어났으나 공급은 예전보다 줄어들고 빵 가격은 5배나 뛰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군대와 민간인들이 뺏고 빼앗는 형국에 악재까지 겹쳤다. 병기 공장 폭발사고로 식수원이 오염돼 주부들과 어린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찾아 헤맸다. 양동이를 들고 늦은 폭설로 진탕이 된 도로를 종일 걷는 일도 다반사였다. 주부들은 식량 부족을 부패한 관리와 상인들의 농간 탓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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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먼드의 빵 폭동은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이 직접 주부들을 설득해 진정됐으나 파장은 길게 남았다. 시위가 남부 전역으로 번져 70여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남부는 군용으로 비축한 식량을 풀어 군대마저 굶주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식량 부족이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점. 극심한 경제난에 빠진 남부동맹은 연속해 무리수를 뒀다. 병력을 채운다며 징병 대상자를 35세에서 45세로 올려 식량 소출이 더 적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노예 20명당 백인 1명꼴로 징집을 면제해주는 법령을 통과시켜 빈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반면 북부의 군대와 주민들은 풍족한 식단을 누렸다. 북군 병사들은 하루에 돼지고기나 베이컨 340g, 생고기나 염장한 쇠고기 112g, 빵이나 밀가루 72g, 건빵 453g 또는 옥수수 566g을 보급받았다. 북부는 어떻게 남부보다 2배 이상인 병력의 식량을 댈 수 있었을까. 토지 무상 불하로 대형 농장이 급증한데다 철도가 발달해 수송이 편리했고 전쟁 중에도 밀려온 이민으로 노동력이 풍부했던 덕분이다. 애초부터 경제력에서 남부는 북부에 한참 뒤졌다. 유럽 귀족보다 부유했던 일부 대형 노예 농장주들의 그릇된 판단이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고 지역을 망친 셈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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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진 채무가 많은 뉴스 전달 머슴입니다.
주로 경제 분야를 취재해왔지만 지금은 국방, 안보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역사와 사람을 사랑합니다. 연재 중인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에 관심과 질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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