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도 달콤함이 느껴지는 도넛이 무려 1,358개다. 한쪽 벽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전시장의 세 벽을 도넛으로 뒤덮었다. 도넛은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초콜릿부터 잼까지 색색의 토핑장식을 보노라면 군침이 고인다. 밀가루로 만든 도넛이 아니라 흙으로 빚어 구운 ‘도자 도넛’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해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가 김재용의 최근작들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본관에 선보였다. 작가의 18번째 개인전이지만 국내 개인전은 처음이다.
안쪽 전시장을 채운 도넛 연작은 지난 2012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것들로 ‘도넛 매드니스!!’라는 제목이 붙었다. “복잡한 생각과 욕망으로 가득 차 일말의 틈도 보이지 않는 현대인의 내면”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따른다.
미국에서 도자를 전공한 그가 ‘도넛’을 굽기 시작한 데는 사연이 있다. 뉴욕에서 작가로 살아가기란 생계를 위한 두세 가지의 일자리가 있어야 할 정도로 각박하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작가의 삶을 포기하려던 그가 마치 마지막인 양 평소 좋아하던 도넛을 흙으로 빚어 벽에 걸었다. 관객들의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웠다. 그들은 도넛을 통해 자신들의 다양한 욕망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새미 평론가의 말처럼 ‘도자도넛’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은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위안을 찾아냈”으며 그 자체가 “되고 싶은 자신을 보여주는 마법의 거울”이 됐다.
도넛 먹고 힘내듯 도넛 보고 즐거워지자는 작가의 단순명료한 외침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파고 들었다. 폭 100cm에 달하는 ‘아주 아주 큰 도넛’ 연작은 즐거운 상상과 욕망의 절정을 보여준다.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소박한 바람이 ‘작은 도넛’이었다면 ‘아주 아주 큰 도넛’은 부풀고 커진 욕망을 드러낸다. 꿀같은 시럽이 금빛으로 흘러내리고 알알이 박힌 크리스털은 찬란하게 빛난다. 도넛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달팽이는 욕망을 좇느라 나아갈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투영하고 있지만 나쁜 존재는 아니다. 저만큼 더 기어가면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라 믿는 희망의 상징이다.
김 작가는 사실 색약이다. 적색과 녹색을 나란히 놓으면 두 색이 비슷해 보이는 ‘색각 이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국내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난 이유다. 한동안 그에게 색은 두렵고 머뭇거리게 만드는 존재였지만 유쾌한 작업으로 이를 극복했다. 이번 전시 제목인 도넛 공포라 해석되는 ‘도넛 피어(Donut Fear)’에 대해 작가는 “도넛의 발음이 ‘두 낫(Do not·하지 말라는 뜻)’과 비슷하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고 소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우울하고 위축되기 쉬운 이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듯하다. 전시는 2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