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송파구의 서울동부지법 내 501호 법정. 이날 법정 안 방청석에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들이 자리를 채웠다. 어린 학생들이 법정을 찾은 건 여고 재학시절 벌어졌던 교사의 성추행 사건 재판을 직접 참관하기 위해서다. 교사가 훈육을 빙자해 여학생들을 끌어안고 잔인한 영상을 강제로 시청하게 했다는 내용이 2018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 처음 알려졌고, 결국 해당 교사는 아동학대 및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정작 학생들은 졸업한 사이 두 차례나 재판이 열렸다는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날 재판을 참관한 졸업생 A씨는 “그동안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학교 측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며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동생 걱정에 직접 재판을 보러 오게 됐다”고 토로했다.
서울시교육청이 2018년 학교 내 성범죄를 막겠다며 내놓은 ‘스쿨 미투’ 대책이 정작 교육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교육청은 스쿨 미투가 벌어질 경우 발생 시점부터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모든 과정을 학내 구성원들에게 알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최근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의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교육 당국의 현실 인식이 안이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에 따르면 지난 2018년부터 올해 2월까지 스쿨 미투가 발생한 서울 26개 중·고교를 조사한 결과 관련 사건에 대한 민형사상 처리 결과가 학내 구성원들에게 공유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스쿨 미투 사건의 처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던 교육청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김정덕 활동가는 “교육청이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으면서 학생들은 가해교사가 수업을 비우더라도 재판을 받으러 간 건지, 휴가를 다녀온 건 지 알 길이 없다”며 “수사상황이 공유되지 않으면 스쿨 미투에 대한 경각심도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판이 끝난 뒤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공유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한해 신고된 60건의 스쿨 미투 가운데 인사조치가 이뤄진 45건에 대해 어떤 교사가 무슨 처벌을 받았는지 알리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선 학교에서는 가해 사실이 확인된 교사가 버젓이 같은 학교로 복귀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2년 전 내놓은 스쿨 미투 대책은 권고사항일 뿐 법적 강제력은 없다는 입장이다. 교육청 관계자는 “발표 당시만 해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방향성만 내놓았을 뿐 관련한 법적 근거는 없었다”며 “개인의 인권과 상충할 우려가 있어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을 기다린 결과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결정에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2015년에도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성범죄 사실이 확인된 교원의 이름을 공개하고 교단에서 퇴출하겠다며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도입을 약속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애당초 지킬 수 없는 대책을 무리하게 내놨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시민단체는 2018년 스쿨 미투로 고발된 23개 학교의 정보를 서울시교육청에 요청했지만 자료가 없거나 개인정보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달 5일 ‘피해자·가해자 분리여부’와 ‘가해교사 직위해제 여부’, ‘교육청 징계요구 내용 및 처리결과’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서울시교육청은 20일 이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