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이른바 ‘노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지난달부터 공원은 문을 닫았지만 주변은 여전히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로 북적였다. 이날 공원 담벼락을 따라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즐기는 노인들은 어림잡아도 30~40명. 이 가운데 마스크를 쓴 노인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대부분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원 인근의 노인들이 많이 찾는 이발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술·담배를 즐기는 노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 찼다.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2주간 추가 연장한 지 일주일 여 지났지만 갈 곳 없는 노인들은 여전히 거리를 맴돌고 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고령의 노인들이 인파가 몰리는 공원 주변 등을 배회하면서 감염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무조건 자택생활을 권장하기보다는 차라리 소규모 야외활동을 보장해주는 등의 현실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서울의 한 게이트볼장 앞에서 만난 노인들은 트로트 음악을 틀어놓고 흥겹게 떠들고 있었다. 게이트볼장은 평소 외롭게 지내던 노인들이 한데 모이는 만남의 장소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게이트볼장 운영이 일시 중단됐지만 노인들은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박모(85)씨는 “자식들이 용돈을 주지만 집에선 마땅히 할 일이 없다”며 “겨울에도 게이트볼을 즐기러 나올 정도로 좋아했지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아 그냥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고 전했다.
노인들이 즐겨 찾던 영등포구의 콜라텍 밀집지역 역시 서울시가 19일까지 유흥업소 집합금지 명령을 내리면서 모두 문 닫았지만 여전히 근처를 배회하는 노인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서울 시내 여러 어린이공원들도 코로나19 이후 어린이 대신 갈 곳 없는 노인들의 차지가 돼버렸다.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안전지킴이’를 하던 이모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입학이 연기되면서 마냥 집에만 있기 답답해 매일 공원에나 가고 있다”고 말했다.
평소 노후 여가활동을 책임지던 사회복지관도 모두 중단되면서 노인들은 더욱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의 한 사회복지관 평생교육팀장은 “어르신들은 일반인보다 면역력이 약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며 “많은 복지관들이 고민은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라고 말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큰 틀은 지켜가되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선 일정 부분 소규모 야외활동을 허용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범중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원칙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게 맞지만 외로운 노인들이 종일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신체·정신건강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며 “구청 차원의 지도감독을 통해 일정 수준의 야외활동을 허용하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장도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키면서 집단보다는 소규모 걷기운동 같은 신체활동을 하는 편이 건강에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