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아동·청소년까지 포함한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유포한 이른바 ‘n번방’ 사건이 불거지며 불법촬영물 유포를 비롯한 디지털성범죄의 처벌이 강화될지 관심이 쏠린다. 특히 오는 20일 열리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관련 양형기준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 눈길을 끈다. 그간 일반 성범죄는 물론 디지털성범죄의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제기돼 온 실정이라, 이번엔 처벌 수준을 높일 기회가 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불안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지난 8일 오후 대법원 민원실에 대형 박스 4개 분량의 종이 보고서가 접수됐다.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과 김영미 법무법인 숭인 변호사가 공동으로 작업한 ‘디지털 성범죄 처벌 국민의견 분석 최종보고서’였다. 지난 1월말부터 이달 7일 사이 시민 2만298명이 화난사람들 홈페이지에 올린 국민의견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를 정리한 것으로, 2만여명의 의견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20일 열릴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전달하기 위한 의견서였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오는 20일 회의를 열어 디지털성범죄를 비롯한 각종 범죄의 양형기준을 논의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성범죄 등 20개 유형에 대한 양형기준이 만들어진 상태다. 현재까지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성범죄에 적용할 양형기준은 없다.
국민의견서를 보면 거의 모두 디지털성범죄에 적용할 형량 범위를 설정할 때 전체적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라고 화난사람들 측은 전했다. 가중 및 감경사유 의견을 주관식으로 받은 후 응답 유형별로 분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특히 형량의 감경 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감경사유 의견에서 ‘감경사유 없음’이나 ‘감경사유 반대한다’는 답변이 전체의 74%인 7,906건이었다. 나머지는 피해자와 합의·보상·사과(32.4%), 자수·자백(20.4%)이 차지했다. 이밖에 피해자와 전원합의나 영상삭제를 위한 노력, 공범 제보 등 수사 협조, 진지한 반성은 1% 안팎에 불과했다. 게다가 감경사유 자체에 대해 무응답한 사람이 1만893명에 달했다. 무응답 자체가 반대 의사표시라는 해석이다.
형량을 가중할 사유로는 ‘n번방’이나 ‘협박’ ‘강요’ 등 키워드가 포함된 행위의 죄질이 나쁜 경우가 전체의 28%인 3,839건으로 가장 많았다.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인 경우가 15.3%로 뒤를 이었다. 그 외엔 불법 음란물의 광범위한 유포(10%), 신상정보 공개 등 피해자 특정(9.9%), 상습 범행(9.2%) 순이었다.
김 변호사는 별도로 첨부한 의견서에서 “많은 가해자들이 끊임없이 생성되어 범죄가 계속되는 것을 막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피해자들과 피해자들이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 지내는 점을 감안한다면 디지털 성범죄의 형량은 지금보다는 높고 엄격하게 처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영상이 인터넷에 퍼진 경우 피해자와 그 가족이 평생 아니 사후까지도 받을 극심한 고통과 사회에 끼치는 해악 등을 고려하여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형량 범위가 설정될 수 있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간 판결은 피해자 동의 없는 영상 촬영 및 유포자에게 연령에 상관 없이 성폭력처벌법 14조의 ‘카메라등이용촬영’ 혐의를 적용했다. 이 경우 촬영 및 유포자는 최대 징역 5년, 벌금 3,000만원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 문제는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영상을 찍은 이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점이었다. 청소년성보호법 11조를 보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제작하면 무기징역 또는 최소 징역 5년 이상, 영리목적 유포자는 최대 징역 10년, 단순 유포자도 징역 7년 혹은 벌금 5,000만원으로 규정한다. 실제 처벌 규정이 훨씬 무거운 법이 있는데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 김 변호사는 의견서에서 “피해자가 아동·청소년이면 모두 법정형이 높은 청소년성보호법으로 의율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반적 처벌 수준도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자료 조사 결과를 보면 2014~2018년 불법촬영죄로 징역형이 선고된 1,577명의 평균 형량은 6.83월. 징역 4개월에서 1년 사이의 형량을 선고 받은 이들이 전체의 98.8%에 달했다. 영상물 유포사범도 평균 형량은 징역 8.91월, 1년 이하의 형이 92.3%다. 이처럼 형량이 적기 때문에 ‘박사’ 조주빈에게 범죄단체조직죄 적용까지 논의된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처럼 여론이 들끓지만 사법부가 전향적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지 의심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법원이라는 조직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다. ‘사법농단’ 파문에서 법원 조직의 관료적 모습의 일단이 드러난 바 있다. 그만큼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참여한 적이 있는 법조계 한 관계자는 아동 성범죄의 예를 들며 “약 10년 전 ‘조두순 사건’이 일어나 국민적 공분이 일어나고서야 아동 성폭력 사범에 대한 형량이 대폭 상향됐다”며 “이런 큰 계기가 드러나 국민적으로 압박이 가해지지 않으면 법원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편 검찰도 디지털성범죄의 범주를 세분화하고, 이에 대한 대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 9일 기존보다 강화된 ‘성착취 영상물 사범 사건처리기준’을 만들어 전국 검찰청에 전달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경우 당사자의 동의 없이 촬영한 영상이나 일반 음란물과는 또 불법성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검은 우선 성착취 영상물의 정의를 제작 과정에서 성범죄나 폭행·협박 등 별도의 범죄가 결부됐거나 아동·청소년이 실제로 등장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런 영상물을 제작·유포·소지할 경우 ‘성착취 영상물 사범’으로 별도 처리 기준을 적용, 영상 제작자는 가담한 정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구속 수사한다. 주범은 죄질이 무거우면 무기징역까지도 구형량을 높인다. 영상을 유포한 이의 경우 영리 목적 혹은 장기간, 대량으로 유포하거나 이른바 ‘공유방’을 운영하는 등 죄질이 불량하면 구속수사한다. 이른바 ‘관전자’ 등 일반적인 소지자라고 해도 재범이거나 공유방의 유료회원에 가입하는 등 행동을 하면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징역 6개월 이상 구형한다. 초범이라도 성인에게는 기소유예는 없다.
검찰의 움직임도 결국 여론에 등 떠밀린 결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n번방’의 전 운영자 ‘와치맨’이 음란물유포죄로 집행유예 기간에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을 또다시 퍼뜨렸는데도 검찰이 징역 3년6개월만 구형한 것이 알려지며 비판이 인 바 있다. 이른바 ‘켈리’ 사건 역시 1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된 후 검찰이 항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가 범죄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형이 상향되기는 어렵다.
다만 검찰은 형량을 정하는 주체가 아니라서 한계가 뚜렷하다. 아무리 구형량을 높이고 구속수사를 한다 해도 최종 선고는 법원이 한다. 시선은 결국 다시 대법원으로 향한다. 디지털성범죄를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각종 여론이 사법부의 보수성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20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주목 받는 까닭이다. 김영미 변호사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기화로 디지털성범죄를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