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5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장 초반 11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 1998년 이후 22년 만의 최저치였다. 최근 유가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주식 시장도 하락 출발하면서 반응했다. 그런데 정오를 넘어서자 10달러가 붕괴하면서 8달러대로 하락하더니 5달러, 3달러, 2달러, 1달러에 이어 0달러대까지 초 단위로 계속 추락했다. 10달러에서 0달러대까지 가는 데 2시간이 안 걸렸다. 바닥이 뚫린 유가는 이후 30분 만에 -35달러까지 자유 낙하했다. -38달러까지 갔던 유가는 결국 -37.63달러에 마감했다. WTI 5월물은 마지막 거래일인 21일 오전 9시40분 반등해 마이너스를 간신히 벗어났다.
이날의 충격적인 유가 하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의한 수요 감소와 저장공간 부족, 선물 만기가 겹쳐 일어났다. 셧다운(영업정지)과 여행제한으로 원유 수요가 급감한 것이 직접적인 하락 요인이다. 국제에너지기구(AEI)는 이달 원유 수요가 1년 전에 비해 하루 평균 2,900만배럴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휘발유 판매가 50% 이상 감소했고 전 세계 항공편 80~90%가 사라졌다. 다음달도 상황은 비슷하다. OPEC+(석유수출국기구와 러시아 등 10개 산유국 연합)와 기타 산유국을 모두 더해 최대 2,000만배럴을 감축하기로 했지만 이를 감안해도 여전히 공급과잉이다.
감산 속도도 느리다. 사우디가 감산일정을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미국만 해도 올해 말까지 220만배럴을 줄인다. 미 경제방송 CNBC는 “기름이 너무 많아 아무도 더 이상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비행기가 날지 않고 세계 석유 생산량의 10%를 자동차에 쓰는 미국인들이 집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유가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저장공간도 부족하다. 전 세계에 68억배럴의 저장고가 있는데 60% 가까이 채워져 있다. 실제 미국 원유 선물을 저장하는 오클라호마주의 쿠싱저장고는 8,000만배럴의 용량을 갖고 있는데 남은 공간이 2,100만배럴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전문가들은 쿠싱의 저장고가 5월에 가득 찰 것으로 보고 있다”며 “카리브해와 남아프리카에서는 저장시설이 거의 다 찼고 앙골라와 브라질·나이지리아는 며칠 안에 채워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물 시장의 특성도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가 나오는 데 일조했다. 원유는 근월물 거래가 가장 많아 이를 지표로 삼는다. 지금은 5월물인데 21일까지만 거래가 된다. 만기일이 다가오면 선물가격이 현물시세에 근접하는데 현재 수요가 없다. 이 때문에 돈을 주고 석유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거래자들도 만기가 되면서 5월물을 팔고 6월물로 갈아타는 ‘롤오버’를 했다. CME그룹에 따르면 5월물 거래는 12만6,000건에 그쳤지만 6월물은 80만건에 달했다.
이 때문에 국제유가의 정확한 상황은 6월물이 보여준다는 게 외신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21일 오전 WTI 6월물은 오전 9시40분 기준 20% 이상 급락하며 배럴당 14달러선까지 떨어졌다. 이미 6월 계약을 하고 있는 브렌트유도 20% 이상 떨어져 배럴당 20달러선이 붕괴됐다.
일각에서는 경제활동 재개로 가을께 수요가 늘어나면서 유가가 다시 30달러대로 올라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WTI 10월물 가격도 32달러다. 일부 유통업자들은 시세 차익을 노리고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빌려 원유 저장에 나서고 있다. VLCC를 1년 임차하는 비용은 7만2,500달러로 전년(3만500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하지만 최소 다음달까지는 변동성이 지속될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제프 커리 골드만삭스 상품 리서치 글로벌 헤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적어도 5월 중순까지는 이 같은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