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왜인 초량왜관 이전

1678년 동아시아 교역중심지




“아침에 33명, 한낮에 왜관 관리자인 관수(館守) 등 454명이 신관으로 모두 옮겼습니다.” 경상좌수사가 조선 조정에 올린 왜관 이전 보고의 골자다. 왜관 이전 과정과 수리 내용 등을 담고 있는 ‘왜관이건등록(倭館移建謄錄)’에 따르면 숙종 4년(1678년) 4월23일, 동래부(현 부산)의 두모포 구왜관에 거주하던 왜인(일본인)들이 초량 신왜관으로 옮겼다. 신관의 면적은 약 10만여평으로 구관보다 10배 이상 컸다. 공식적으로 500여명, 조선을 속이고 몰래 들어온 인원까지 포함하면 1,000여명의 왜인이 여기서 살았다.


조선에 왜관이 공식 개설된 시기는 태종 7년(1407년). 왜구에 골머리를 앓던 조선은 회유책을 썼다. 투항한 왜구에게 땅과 집을 주고 제포(내이포)와 부산포 2곳을 왜인 거주구역으로 삼았다. 조선이 날로 늘어나는 왜인의 거주를 제한하자 제포와 부산포, 염포(울산)에서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왜인들은 보름 만에 꼬리를 내렸으나 조선 백성과 군사 272명이 죽고 민가 796채가 불탔다. 왜인들의 거병 이유는 ‘조선 관리의 통제 강화’. 조선인 상대의 고리대금업과 불법 토지매매를 금지하자 칼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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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들은 싹싹 빌며 재발 방지를 언약한 맹세를 거듭 어겼다.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을 연달아 일으키더니 1592년 임진년에는 사죄 사절이 오갔던 한양 길을 따라 전면적인 침략에 나섰다. 임진왜란으로 사라졌던 왜관은 1607년 두모포에 다시 들어섰다. 조선이 안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허용한 왜관을 일본은 철저하게 써먹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선에 일본은 왜구의 재침 가능성을 흘려 당시 도자기 원료인 백토 2,075톤을 공짜로 가져갔다. 효종이 북벌용으로 준비한 조총 4,000정을 공급해 환심도 샀다.

초량 신왜관은 두모포 왜관 개설 직후부터 70년을 졸라서 얻어낸 결과물. 동래부에서 이전 요구 시위를 벌이던 왜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은 3년간 연인원 125만명을 동원해 왜관을 새로 지었다. 초량 왜관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 조일 무역 전성기를 이끌었다. 조선은 인삼과 중국산 비단 판매대금을 일본산 은(銀)으로 받아 중국에서 다시 비단을 사서 왜인에 파는 중개무역으로 이익을 누렸다. 통제와 교린, 상호 이익의 장소였던 초량 왜관은 이제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 과정에서 교린의 과거를 지웠고 우리는 관심이 없었다. 최근 학계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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