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색인문학] 죽음 앞에서 양보·겸손의 미덕을 깨닫다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죽음과 평등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돈이면 다되는 자본주의사회서도

글로벌 부자·권력자도 똑같이 죽어

죽음만이 인간 존재의 평등 입증

신 아닌 인간이 죽음을 부정한다면

평등의 가치·지혜의 원천 고갈시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즉 돈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이 교환될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기에 돈의 전능한 위세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돈은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정확하게 수량화한다. 손쉽게 수적 차별과 위계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애써 감추고 싶더라도 서로 간의 불평등이 고스란히 폭로될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우리처럼 청바지를 입고 햄버거를 먹는다 해도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 그들이 다른 미국인들처럼 똑같이 한 장의 투표용지만 받을 수 있더라도 다른 미국인들과 절대로 똑같지 않다.


아마존 설립자인 제프 베이조스 최고경영자(CEO)는 이달 15일 기준 1,380억달러(약 168조원)의 자산을 보유해 세계 최고 부자라고 한다. 수치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나라의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해보자. 베이조스라는 개인의 자산이 세계 GDP 순위 60번째인 에콰도르(1,079억달러)보다 많다. 에콰도르는 면적 약 28만㎢(한반도의 1.284배), 인구는 약 1,764만명인 나라다. 이 나라가 1년 동안 생산한 경제적 가치가 베이조스의 재산만도 못한 셈이다. 돈을 척도로 삼는다면 인간은 분명 평등하지 않다. 돈이 아닌 다른 척도로 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근력이 뛰어나고, 어떤 이는 음악에 소질이 있고, 다른 사람은 말재간이 탁월하다. 그렇다면 ‘평등’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갓 비현실적인 이상이나 공상에 불과한 것 아닐까.

지상에 존재하는 평등은 오직 죽음뿐일지도 모른다. 신화나 종교에 등장하는 불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면 누구나 죽는다는 점만큼은 지금껏 예외가 없었다. 박정희·김일성 같은 절대권력자도, 잡스 같은 글로벌 부자도 모두 똑같이 죽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죽음만이 평등을 입증하고, 죽음만이 약한 이들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게이츠는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만일 그가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라면 그처럼 배짱 좋게 기부할 수 있었을까. 죽음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명예도 무의미해지기에 사람들은 양보와 겸손의 미덕을 배울 수 있다. 어차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니 아낌없이 베풀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특히 불평등 구도 내의 오만했던 강자마저 현자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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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탈출하는 것을 대단한 진보인 양 떠벌리고 있다. 정말 그럴까. 지구는 인간의 불가피한 조건이 아닐까. 지구 생태계와 인간은 아주 견고한 끈으로 엮여 있어 마치 물고기가 물 바깥에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은 지구라는 환경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인간의 몸마저 ‘인공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지구와 이어진 탯줄, 그 마지막 끈조차 제거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육체뿐 아니라 지능까지도 인공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환호하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 등장하기도 했다. 영생을 위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자기 몸뚱이를 포함한 자연을 버리려 한다. 옛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는 인간이 불멸하고자 기계가 되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잘 보여줬다. 불멸하는 인공지능(AI) 로봇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죽지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생명이 없던 것이거나 불멸하는 신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라는 작품에는 아폴론과 죽음의 신이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식과 의료의 신 아폴론은 장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하지만 죽음은 오히려 그것의 해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가진 자를 위하여 그 법을 세우는 것이오.…그렇게 되면 그럴 능력이 있는 자들은 고령의 죽음을 사게 될 것이오.”

알케스티스 왕비를 지키기 위해 죽음과 싸우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영국 프레드릭 레이튼 경의 회화./미국 워즈워스 아테니움 미술관 소장알케스티스 왕비를 지키기 위해 죽음과 싸우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영국 프레드릭 레이튼 경의 회화./미국 워즈워스 아테니움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의 배경 신화는 이렇다. 아드메토스 왕은 죽을병에 걸린다. 신으로부터 대신 죽어줄 사람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도 대신 죽기를 거부할 때, 부인 알케스티스가 남편 대신 죽기를 자청한다. 왕은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살까지 생각한다. 마침 왕의 친구 헤라클레스가 왕궁에 들르고, 왕은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헤라클레스를 후하게 접대한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헤라클레스는 술주정하며 말썽까지 부린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헤라클레스는 저승까지 찾아가 저승사자를 무력으로 제압한 뒤 알케스티스를 구해온다.

불멸을 위한 과학기술은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는 평등을 비롯한 수많은 가치와 미덕, 그리고 지혜의 원천을 고갈시킨다. 그런데 알케스티스로 상징되는 메시지, 즉 ‘사랑만이 죽음을 이긴다’는 상투적인 믿음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사랑이란 평등의 법을 정초하고 불평등한 ‘예외상황’을 결정하는 지고의 주권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송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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