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느 사람들과 같이 월급날과 휴가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번 사건으로 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23일 자진 사퇴한 오거돈 부산시장으로부터 강제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 공무원 A씨가 이날 부산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밝힌 입장문이다. A씨는 이달 초 업무시간 처음으로 오 시장 수행비서 호출을 받았고 업무상 호출이라는 말에 서둘러 집무실에 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오 시장은 A씨와 면담 과정에서 특정 신체 부위를 만졌고 이에 격분한 피해 공무원은 변호사와 함께 부산 성폭력상담소를 찾아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렸다.
이날 오 시장의 사퇴 기자회견은 피해 공무원의 성추행 사실 폭로 예고에 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 공무원은 자신의 피해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4월 말 이전 사퇴할 것과 사퇴 이유에 강제 추행 사실을 명확히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피해 공무원은 이날 “정치권의 어떠한 외압과 회유도 없었으며 정치적 계산과도 전혀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는 오 시장 반성 기자회견에 대해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A씨는 “그곳에서 발생한 일에 경중을 따질 수 없고 명백한 성추행이었고 법적 처벌을 받는 명백한 성추행이었다”며 “‘강제추행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경중에 관계없이’ 등 표현으로 제가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비칠까 두렵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현재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 시장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여성 관련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해 10월 강용석 변호사와 김세의 전 MBC 기자 등이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는 오 시장이 한 여성 공무원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오 시장 측은 이들의 계속된 주장을 ‘가짜 뉴스’라고 규정하고 강 변호사 등 3명을 대상으로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11월에는 시청 근로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자신의 양옆에 여성 근로자들을 앉게 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또다시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면서 시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부산성폭력상담소는 이날 성명에서 “이번 사건은 오 시장이 당선 이후 성희롱·성폭력 전담팀 구성을 미뤘던 모습이나 지난 2018년 회식자리에서 여성노동자들을 양 옆에 앉힌 보도자료 등에서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다”며 “낮은 성인지 감수성과 이를 성찰하지 않는 태도는 언제든 성폭력 사건으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은 오 시장에 대한 내사에 착수했다. 이날 부산경찰청은 여성청소년수사계가 오 시장이 사퇴하며 밝힌 성추행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오 시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성추행 내용 외에 구체적인 범행 시점과 경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 시장의 사임 통지서는 이날 부산시의회에 제출됐다. 지방자치법에 따라 사임통지서는 접수된 날로부터 바로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변성완 행정부시장이 시장 권한대행으로 부산시정을 이끈다. 오 시장의 사퇴에 따라 정무 라인도 일괄 사퇴한다. 오 시장 사퇴에 따른 보궐선거는 내년 4월 첫 번째 수요일인 7일께 치러질 예정이다.
오 시장의 사퇴로 1호 공약인 동남권 관문공항 건설 추진 작업에도 차질이 생길 것을 보인다. 동남권 관문공항 사업은 부산·울산·경남과 대구·경북 등이 10여 년에 걸쳐 유치경쟁을 벌이다 2016년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오 시장이 김해 신공항 백지화를 주장하면서 논란이 재점화했다. 현재는 부·울·경 시도지사의 요구에 따라 국무총리실에서 검증작업이 진행 중인데 오 시장이 물러나면서 앞으로의 추진 동력에 힘이 빠지는 모양새다.
오 시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행정 전문가이자 해양전문가로 평가받는다. 4번째 도전 끝에 2018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에 당선됐다. 오 시장 당선으로 민선 1기 이후 23년 만에 처음으로, 그 이전 보수정권의 임명직 단체장 시절을 합하면 30여년 만에 부산지방 권력이 보수에서 진보로 교체됐다. 오 시장은 행정고시를 통해 1974년 부산시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이후 상수도사업본부장, 기획관리실장, 정무부시장, 행정부시장 등을 모두 거쳤다. 해양수산부 장관과 한국해양대 총장 등도 역임한 바 있다. 오뚝이 같은 삶을 살던 그는 취임 2년을 못 채우고 성추행이란 불명예를 안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부산=조원진기자 bscit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