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지난 1960~1970년대 고도성장의 기틀을 닦았던 김정렴(사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 25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기간 18년 중 16년 이상 차관 이상의 고위공직을 지내며 ‘박정희 정부의 최고실세’ 또는 ‘박 전 대통령을 가장 잘 아는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 차례 장관직과 무려 9년3개월간의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으며 부가가치세 도입, 포항제철 건설 등을 일궈내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 회장은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그 직후 강제 징집돼 일본군에 배속된 뒤 히로시마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다. 해방 이후 육군보병학교를 거쳐 육군 준위로 임관해 6·25전쟁에 참전한 뒤 1952년 예편했다.
1956년 한은으로 돌아와 조사부 차장, 뉴욕사무소장 등을 지낸 고인은 1962년 단행한 화폐개혁의 실무책임자를 맡으면서 박 전 대통령의 주목을 받았다. 1966년 1월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됐지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김두한 전 의원이 국회에 오물을 투척하자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등 내각이 총사퇴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듬해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발탁돼 2년간 재임하면서 포항제철 건립,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월까지 9년3개월에 걸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며 1960~1970년대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그려 박정희 시대의 실질적인 ‘경제사령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출진흥정책·부가가치세 도입도 고인이 이룬 결과물이었다.
고(故) 백상 장기영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 창간 발행인과도 인연이 깊다. 1964년에는 일본과 어업협력자금 및 선박관계자금 교섭 협상을 벌이던 장 창간발행인을 측면 지원했고 그해 장 창간발행인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을 때도 주요 경제 문제와 대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당시 고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시장자유화 정책을 단행해야만 수출·공업 입국과 지속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또 그가 상공부 차관으로 임명된 때도 장 부총리의 천거가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재직 당시 고인은 엄격한 청와대 내부관리로 유명했다. 특히 기강을 세우는 데 엄격해 경호실장인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조차 그의 눈치를 본 것으로 전해진다. 고인은 1978년 12월 당시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보다 득표율이 낮게 나온 책임을 지고 비서실장을 그만뒀지만 곧바로 주일대사에 임명됐다.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족으로는 김희경, 두경(전 은행연합회 상무이사), 승경(전 새마을금고연합회 신용공제 대표), 준경씨(전 한국개발원 원장)와 사위 김중웅씨(전 현대증권 회장, 전 현대그룹 연구원 회장)가 있다. 빈소는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 14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8일 오전8시30분이다. (02)3410-6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