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남북협력의 길을 찾아나서겠습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가 남북협력의 새로운 기회일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친서를 보내 우리 국민을 위로하며 응원했고 나도 이에 화답했습니다. 남과 북은 하나의 ‘생명공동체’입니다.”
지난 4월27일 판문점선언 2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이같이 밝혔다. 지난 2년 동안 판문점선언 합의를 실질적으로 많이 이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향한 절박함이 묻어나왔다. 이날 문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 이후 1년 이상 멈춰 있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겠다는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내비쳤다.
여기에 지난 2일 김정은이 20여 일 간의 잠행을 끝내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문 대통령이 내민 손을 바로 잡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종국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는 북한의 태도, 코로나19 확산, 김정은의 불확실한 건강 상태 등이 당분간 각종 남북협력 사업 추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판문점선언 미이행은 국제제재 탓”... ‘북한’ 언급 ‘0번’
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김정은의 이름을 세 차례나 호명할 정도로 그의 ‘신변 이상설’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문 대통령은 “나와 김정은 위원장이 손을 잡고 함께 군사분계선을 오가는 장면은 8,000만 겨레와 전세계에 벅찬 감동을 줬다” “나와 김정은 위원장 사이의 신뢰와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평화경제의 미래를 열어 나가겠다” 등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파트너로서 김정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한 발언을 수 차례 했다. 마치 김정은의 건재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특히 문 대통령은 “판문점선언 실천을 속도 내지 못한 것은 결코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라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제적 제약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의지’라는 표현에는 판문점선언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 한국 정부의 탓도 아니지만 북한 정권의 탓도 아니라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담겼다.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제재가 발목을 잡았다는 데 결론을 모은 셈이다.
공교롭게도 문 대통령은 이날 긴 발언을 하는 동안 ‘북한’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남북’ 외에는 ‘남과 북’이라는 단어만 두 차례 사용했다. 북한이 아니더라도 ‘북’이든, ‘북측’이든, ‘북쪽’이든, ‘북조선’이든 북한만 별도로 지칭하는 표현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즉, 남북협력을 요구할 때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북한도 호응해야 한다’ 류의 주문 자체를 아예 하지 않은 셈이다.
문 대통령은 이어 “여건이 좋아지길 마냥 기다릴 수 없다”며 “우리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코로나19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협력부터 시작해 가축 전염병과 접경지역 재해재난, 기후환경 변화 공동 대응 등 생명의 한반도를 위한 남북교류와 협력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기를 바란다”며 남북 공동 유해발굴 사업,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실향민 상호 방문 등의 추진 계획을 명확히 했다.
靑 의지에 ‘2.8조’ 동해북부선 ‘나 먼저’ 착공
문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첫 사업으로 통일부와 국토교통부는 27일 강원 고성군 제진역에서 동해북부선 사업 추진 기념식을 열었다. 기념식에는 김연철 통일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등 각계 인사가 참석했다. 김연철 장관은 기념사에서 “동해북부선 건설은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새로운 ‘한반도 뉴딜’ 사업”이라며 “코로나19로 어려움에 빠진 우리 경제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동해북부선 건설 사업은 2000년부터 추진돼 왔던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의 일환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2018년 판문점 선언을 통해 경의선·동해선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등을 연결하고 현대화하는 데 합의했지만 지금까지 이행된 것은 없다. 동해북부선은 강릉에서 제진역을 잇는 종단철도다. 지난 1967년 노선이 폐지된 후 지금까지 단절된 상태로 남았다.
이번 건설 사업은 남강릉역에서 제진역까지 총 110.9km를 잇는 구간을 단선 전철로 만드는 사업이다. 내년 말 착공 계획이며 총 사업비는 2조8,520억원에 달한다. 이달 23일 남북협력사업으로 지정돼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가 가능해졌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이른바 ‘명예승차권’을 참석자들에게 배부했는데 강릉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가격을 61만5,427원으로 책정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4·27정상회담을 기념하자는 의미였다.
손병석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운임이 원래 120만원 정도 인데 반값 특가상품이 됐다”고 너스레를 떨자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티켓은 받았는데 가지를 못하네”라고 말하며 씁쓸히 웃었다.
북한을 향해 잇는 철도 사업 기념식임에도 초청된 북한 사람은 물론 한 명도 없었다. 일부 시민들은 ‘사업성도 없이 일단 철도부터 완성하면 타는 사람도 없이 매년 운영비만 나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내비쳤다.
김정은 건강 상태와 코로나19, 북미관계 등은 변수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 남북협력에 속도를 내는 것은 지난 4·15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정 과제를 밀어붙여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게다가 국내 코로나19 상황이 진정세로 접어든 데다 세계적으로 모범 방역을 했다는 자부심이 ‘코로나19는 남북협력의 기회’라는 발상까지 닿았다는 분석이다. 한 달 남짓 남은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 행사와 연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한 추진 작업도 남북교류사업을 서두르려는 이유와 연관된 것으로 진단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코로나19가 기회가 아니라 여전히 큰 장벽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곳곳에서 나온다. 북한과의 직접 접촉이 더 어려워지면서 당장 물적 교류는 가능해도 인적 교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란 관측이다. 의료체계가 부실한 북한은 경제 충격을 무릅쓰고 우방국인 중국, 러시아 등과도 지난 1월부터 국경을 봉쇄했을 정도로 코로나19 방역에 폐쇄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정은이 신변 이상설을 뚫고 생존을 과시했지만 그의 건강 수준도 여전히 불확실한 영역으로 남았다.
문 대통령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자”고 재촉했지만 미국의 북미관계 무관심 역시 부담이다. 김정은이 돌아왔지만 1년 넘게 남북협력 사업을 외면하던 그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 가능성 없이 굳이 한국하고만 교류 사업을 재개할지는 미지수다. 현 정부 들어 ‘우리 민족끼리’ 교류를 더 적극적으로 강조한 건 의외로 늘 문재인 정부였고 북한 김정은은 언제나 미국으로 가는 징검다리로서 한국을 대하는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