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14일 오후4시20분 네덜란드 항구도시 로테르담. 루푸트바페(독일 공군) 소속 하인켈 111s 쌍발 폭격기 90대가 폭탄 97톤을 떨어뜨렸다. 도심에 집중된 독일의 폭격은 로테르담을 폐허로 만들었다. 마침 거세게 불던 바람으로 건물과 주택 대부분이 타버려 약 2.6㎢(78만6,500평)의 땅이 수평으로 바뀌었다. 건물 2,320동과 교회 24개, 학교 62개, 하역 창고 775동이 사라졌다. 주택 2만4,978채가 타버려 8만5,000여명이 집을 잃었다. 인명피해도 컸다. 884명이 죽고 7,000여명이 다쳤다.
우생학에 빠져 인종적 우월감에 젖어 있던 독일이 게르만의 일족으로 대우한 네덜란드를 맹폭한 것은 저항이 예상보다 강했기 때문. 침공 나흘이 지나도록 주요 도시에서 ‘약체’로 여겼던 네덜란드군의 저항에 봉착하자 ‘항복하지 않으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겠다’고 경고한 뒤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독일의 대규모 공습은 성과를 거뒀을까. 전술적으로는 그랬다. 네덜란드가 폭격 직후 항복했으니까. 프랑스군 휘하로 들어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던 남부지역의 군대도 5월17일 중세 이래의 고도(古都) 미델뷔르흐까지 폭격당하자 백기를 들었다.
유럽의 작은 나라들은 독일군의 무자비한 폭격을 당하느니 미리 알아서 손을 들었다. 독일은 득의양양했으나 중장기적으로 로테르담 폭격은 화근으로 작용했다. 영국인들은 ‘군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이고 야만적인 독일’을 비난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사망자가 3만을 넘는다고 부풀리며 증오를 부추겼다. 영국은 독일 최대 공업지역인 루르와 수도 베를린을 폭격하고 독일은 코번트리 공습으로 맞섰다. 복수가 복수를 낳으며 전쟁 내내 영국 런던과 독일 함부르크·드레스덴·쾰른이 폭탄의 비를 맞았다.
보복의 악순환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아라이 신이치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가 쓴 ‘폭격의 역사’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에서 6%였던 민간인 사망자 비중이 2차 세계대전에서는 60%로 치솟았다. 연합국과 추축국의 어떤 나라도 대량학살의 광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국의 B-17 중폭격기와 B-29 전략폭격기는 가장 우수한 성능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죽였다. 폭격기가 네덜란드를 구한 적도 있다.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들은 전쟁 말기 기아에 허덕이는 네덜란드 전역에 빵과 비상식량·초콜릿을 뿌렸다(만나 작전). 소망한다. 무기가 증오와 보복의 수단이 아니라 선행의 도구로 쓰이는 날이 많아지기를.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