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였던 지난 2월 한국화학연구원이 27명의 연구자 채용공고를 냈더니 총 510명의 지원자 중 기업 연구원이 114명(22.4%)에 달했다. 지난해 24명 뽑을 때 기업 연구원 지원 비중이 19.4%였던 것보다 3%포인트 늘었다. 이미혜 화학연 원장은 “기업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연구개발(R&D) 투자를 축소하거나 부서를 구조조정하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올 2·4분기 들어 기업들의 매출과 이익 감소폭이 커지면서 벤처·중소기업을 위주로 R&D 투자가 본격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세계적인 셧다운과 공급망 붕괴로 인해 자동차·조선·해운·철강·건설·석유화학 등 기존 주력산업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기초연구 위주의 학계, 기초·응용연구를 하는 출연연, 응용·개발연구의 기업이라는 국가 R&D의 3각축 중 주요 축이 삐거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전자파 차폐기술로 인정받는 소재 벤처인 엔트리움의 정세영 대표는 “주변 기업들을 보면 미래를 대비한 R&D를 줄이고 있어 큰일”이라며 “대기업의 투자감소가 연쇄적으로 중견기업과 중소·벤처기업의 R&D 위축으로 전이되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소재·부품·장비 업계가 무급휴가나 도산 사례가 이어지면서 R&D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7월 일본의 경제도발 이후 민관합동으로 쌓아온 소·부·장 국산화와 신기술 개발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 한 반도체 장비 기업은 R&D종합센터를 연초에 준공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연기했다. 이 업체 대표는 “미래가 불투명해 우선 생존을 도모한 뒤 R&D 투자 확대를 모색하겠다”고 토로했다. 한 소재 분야 중견기업은 “복합불황이라 일단 기초연구를 축소하고 응용·개발연구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털어놨다.
정보기술(IT) 벤처·스타트업의 R&D도 위축됐다. 기업들이 설비나 소프트웨어(SW) 투자를 꺼리고 해외 상황도 언제 풀릴지 모르는데다 벤처캐피털(VC)의 투자도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 1·4분기 신규 벤처펀드 결성액(5,048억원)은 전년 동기보다 21.3% 감소했다.
주력산업의 R&D 축소도 반도체를 제외하면 예외가 아니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수출이 급감하며 타격이 심한데 기술력 있는 부품업체나 한국GM·르노삼성 등의 기술인력 감축이 적지 않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개발을 위해 R&D를 늘려야 하는데, 국내 자동차업계의 기술인력은 3만~4만명으로 독일(2018년 11만4,000명) 등 경쟁국보다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모든 산업의 R&D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로 수요가 급증한 진단키트, 치료제·백신, 항균필름 등의 바이오헬스케어나 언택트(비대면) 시대를 맞아 활기를 띠는 온라인쇼핑이나 원격의료·원격교육 등의 R&D는 강화되고 있다. 고대구로병원 개방형 실험실을 총괄하는 송해룡 고대 의대 정형외과 교수는 “빅데이터·인공지능(AI)을 활용한 디지털치료 융합과제가 늘었다”며 “AI 활용 환자 맞춤형 항암 처방과 VR(가상현실)·AR(증강현실)기기와 스마트폰을 이용한 질병예방·건강관리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 개발이 시급하다”고 힘줘 말했다.
하지만 기업 R&D가 2·4분기 들어 더 위축되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적 분석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3월11~16일 연구소 보유 기업 1,490개를 조사한 결과, 응답기업의 47.7%와 41.3%가 연초 계획보다 각각 R&D 투자와 연구원 채용을 줄일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국가 R&D(2018년 85조7,287억원) 중 기업 R&D가 정부 지원이 포함돼 있다고 해도 80.3%인 것에 비춰보면 심각한 문제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기업 R&D가 위축되면 개발·응용연구가 직격탄을 맞게 되고 자연스레 기초연구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정부의 지원과 산학연 융합연구의 활성화를 촉구했다. 정부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미래성장동력을 확충하고 초격차 기술확보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K방역으로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롤모델로 떠오른 기회를 살려 과학기술 K뉴딜로 고부가가치화를 꾀하자는 게 황 회장의 생각이다.
이우일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IMF 때처럼 R&D 인력 감소 조짐이 있고 재난지원금 조달을 위해 정부가 R&D 예산을 깎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며 “자칫 선도자(퍼스트무버)로 전환해야 하는 목표가 요원해질 수도 있는데 절대 ‘농사지을 씨앗’까지 먹어 치워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정부의 R&D 과제가 올해 24조원으로 양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1위이지만 기업 R&D 지원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이러스를 잡는 축광식 광촉매 신기술을 선보인 김승진 에이피씨테크 대표는 “정부가 올해 출연 연구원과 대학·기업에 24조원을 지원하기로 한 R&D 과제를 신속히 집행하고 산학연 융합연구를 촉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정세영 대표는 “R&D 과제에서 중소기업의 현금부담률을 낮추고 과제 기간 한시 연장이나 연구계획 변경, 기술료 납부 연장이 필요하다”고 거들었다. AI 코스닥 기업을 운영하는 이석중 라온피플 대표는 “AI가 핵심인데 학습용 데이터에 정답지를 달아주는 일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며 “이런 첨단 분야에 젊은이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예산을 지원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제안했다.
산학연 R&D의 효율화와 함께 원격의료 등 바이오헬스케어 신산업 육성도 핵심과제로 꼽힌다. 윤종록 한양대 특훈교수는 “창의력을 원천으로 한 소프트파워가 중요한데 그 핵심은 R&D 리더십”이라며 “비대면 문화에서 데이터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데 의료 등 산업을 AI와 결합해야 패권을 잡을 수 있다. 이를 막는 제도적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