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일·외교·안보

[한일갈등 전문가진단] "사법보단 외교적 해법으로…남은 두달간 대화 재개 충분"

■외교 원로들에 들어보니

공동의 미래 전략적 목표로

조금씩 양보하는 방안 도출

국익·피해자 실익 중점 두고

정치권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지난 2018년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판결과 지난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 보복으로 촉발된 한일관계는 이달 들어 다시 한 번 깊은 늪에 빠졌다. 정부는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 재개를 선언했고 법원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의 국내 자산 강제 매각 절차에 대한 공시송달을 결정했다. 상호 보복 대응이 본격화되며 활로가 보이지 않는 한일관계, 외교안보에 수십 년 잔뼈가 굵은 원로들은 그 해법을 어떻게 볼까.

라종일(80) 가천대 석좌교수(전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및 주일한국대사), 김숙(68) 전 주유엔대표부 대사, 강창일(68)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전 한일의원연맹 회장), 신각수(65) 전 주일한국대사(전 외교통상부 1·2차관) 등 외교안보 원로들은 강제징용 판결과 강제 자산 매각 결정은 사법부의 영역이라도 정부까지 외교적 노력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고위 실무급들이 나서 틀에 박힌 대화보다는 허심탄회한 논의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양국 국민들은 반일·반한 정서가 여전하고 최고위급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일 갈등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자세가 역력하지만 정부 당사자들 간에는 공시송달의 효력이 발생하는 8월4일 전까지 얼마든지 창의적 방안을 위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삼권분립이 원칙이기는 하나 외교적 교섭 등을 이유로 ‘사법 자제’를 강구하는 방법도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강 전 의원은 7일 서울경제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가 올 1월 초만 해도 (강제징용 판결과 수출규제 문제를) 대화로 풀려는 의지가 있었다”며 “그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지지도가 안 오르니 한일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원인 제공은 일본이 했지만 정치는 생물과 같다 보니 그 사이에 대화가 재개될 수 있다고 본다”며 “지난해에도 당장 (일본 수출규제로) 나라가 망할 것 같이 반응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8월4일까지 여유는 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김 전 대사는 “한국과 일본이 미래 비전을 위한 공동의 전략적인 목표를 갖고 (접근)한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게 나올 수 있다”며 “법원에서 공시송달 결정이 나오기는 했지만 양국 간 외교 협상이 진행 중일 때는 국익 차원에서 사법 자제를 통해 강제 매각 집행을 유예하는 요청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강경화(오른쪽) 외교부 장관이 지난해 12월24일 중국 쓰촨성 청두 리츠칼튼호텔에서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강경화(오른쪽) 외교부 장관이 지난해 12월24일 중국 쓰촨성 청두 리츠칼튼호텔에서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안보 원로들은 특히 한일 간 대화 과정에서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최고위급들이 직접 사안을 챙기기보다는 외교부 등 실무 부처가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내각부와 청와대가 외교 사안을 모두 주도하다 보면 각자 자국의 정치적 요소를 너무 의식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신 전 대사는 “일본은 아베 총리와 내각부가 (한일관계 작업을) 다하고 우리는 청와대에서 다하는 형국”이라며 “옛날에는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감정을 배제한 채 만났는데 지금은 외교 사안에 국내 정치적 요소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졌다”고 우려했다. 김 전 대사는 “정상회담은 합의에 실패할 시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위험이 있다”며 “실무진이 나서기에는 늦었고 장관급과 같은 고위 간부들이 대면으로 만나 창의적 방안을 만들어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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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역시 명분에 대한 집착이나 여론몰이식 대응을 내려놓고 국익과 피해자들을 위한 실익 위주로 접근해야 한다는 쓴소리도 잇따랐다.

라 교수는 “정치인들이 사법부가 결정했으니 안 된다는 얘기만 하지 말고 직접 외교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며 “사법부 판단만 필요하다면 외교부와 정치인은 왜 필요한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나름 뭔가를 해보려다 시민사회가 반대하고 청와대가 받아주지 않으면서 막혔다”며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도 외교를 옳고 그른 입장만 따져서 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신 전 대사는 “피해자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정부의 노력이 거의 없다”며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과 우리 사회가 느끼는 감도 차이는 엄청난데 반일 명분만 내세우고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피해자 중심주의로 해결한다면 피해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피해자들은 사실 돈을 받는 데 가장 관심이 많다”며 “대부분 소득 하위계층인 이분들은 명분보다는 현실적으로 배상금이나 보상금을 받으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만 대화에 의지를 보일 것이 아니라 일본 역시 대화 창구로 나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는 목소리도 강하게 나왔다. 강 전 의원은 “일본이 대화를 좀 해줘야 한다”며 “그동안은 (일본이) 문을 걸어잠그고 모든 것을 중단시켜서 외교 문제를 얘기할 겨를도 없었다”고 답답해했다.


윤경환·박우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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