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꽂이-문명과 혐오]이유없이 죽어간 사람들…혐오를 혐오한다

■데릭 젠슨 지음, 아고라 펴냄

美 노예제 폐지후 인종차별 심화

나보다 '낮은 존재'가 동등해지면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번져

경기 악화땐 노골적인 차별·배제

혐오의 역사적·사회적 뿌리 분석




백인에 의해 가혹하게, 흑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이는 조지 플로이드 뿐만이 아니었다. 100년도 더 전인 1918년, 미국 조지아 주에 살던 흑인 여성 매리 터너의 남편은 다른 흑인 남자가 한 백인 농부를 죽였다는 이유로 백인 남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임신 8개월의 터너는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자 수백 명의 백인 무리가 그녀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기름 부은 옷에 불을 붙였고, 배를 갈라 바닥에 떨어진 태아를 밟아 죽였다. 2001년 콜롬비아에서는 ‘암살대’라는 백인들이 40여 명을 학살했다. 전기톱으로 신체를 자르는 만행이 있었지만 피해자들은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미국에 노예제가 존재했던 남북전쟁 이전에는 지금처럼 ‘묻지마 폭행·살인’ 식의 흑인에 대한 가혹행위가 오히려 적었다. 이유 없는 혐오는 노예제 폐지 후에 급격히 늘었다. ‘문명과 혐오’의 저자 데릭 젠슨은 “사람들이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전에는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겼던 자원을 가질 수 없게 될 때 불안해진다”는 심리적 이유와 함께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람은 자기가 얕보는 사람을 혐오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나란히 거론한다. 주인이 노예의 목숨과 노동에 대해 무제한적 권한을 갖고 있을 때는 굳이 노예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보다 낮은 존재이니 내려다보기만 하면 됐다. 예전처럼 노예를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됐을 때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바뀐다”. 저자는 “(혐오는) 종종 대대적이고 극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뀌는데 이는 위계질서의 상층에 위치한 이들을 위해 다시 노동을 제공하도록 예전 노예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문명이 발달하고 민주화가 다져진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졌으리라’는 믿음을 깡그리 날려버리는 이 책의 원제는 ‘The Culture of Make Believe’, 즉 ‘믿게 만드는 문화’이다. 특정 인종과 민족, 성별에 대해 가해진 혐오의 역사와 사회적 뿌리를 문명사 전체를 관통해 파헤친 역작으로, 이미 지난 2008년에 ‘거짓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 출간됐을 당시에도 화제였다. 이 책을 10여 년 만에 소환해 재출간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나빠진’ 우리 사회를 반추하게 한다. 저자는 “인종차별적 혐오는 너무 오래돼 ‘혐오’라고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개정판 서문에서 그는 갈등은 격화됐고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졌으며, 계층·계급 사다리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한 혐오가 극렬해지고 있는 현재를 직시했다.



저자는 “경기가 나쁠 때나 경제가 몰락하는 시기에, 제국의 멸망기에 노골적인 또는 더 포괄적인 혐오 행위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소수자 린치, 강간, 포르노 사이트의 성행, 아동학대, 계급 착취, 생태 파괴 등 저자가 아우르는 문제들은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단 하나도 피해가지 않는다. 전 지구적 상황을 놓고 보면 경찰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던 흑인들의 숱한 죽음의 사례들이 있고, 많은 여성들이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간’을 당했으며, 매년 최소 100만 명의 제3세계의 소녀들이 ‘매춘경제’에 내몰렸다. 값싼 수분 보충제가 없어 죽은 50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을 비롯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임에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매년 1,1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 ‘게으르다’는 이유로 땅을 뺏기고 노예가 된 아프리카 원주민, 휴지처럼 쓰이고 버려진 수백만 중국인 이주노동자 등의 사례를 저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대량 학살’로 보고 인간을 인권 이전에 생산의 수단으로만 본 경제 체제에 일침을 가한다. 책이 보여주는 사료와 사례들은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여러 곳에서 나타났고, 인간은 생각 이상으로 잔혹했다.

문명의 시작과 함께 노예제가 탄생했듯 “차별과 배제, 혐오는 문명의 형성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꽃처럼 피어난 고대의 문화, 아름다운 예술과 눈부신 과학, 고상한 유럽 국가들의 문명이 가능했던 기본 조건이 바로 “타인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생명보다 생산을 중시할수록 인격 하나하나의 소중함보다 제도적 잣대를 먼저 들이대는 사회적 믿음이 작동한다. 문화적·개인적 역사를 갖췄고 욕구와 희망을 갖춘 ‘같은’ 인간임에도 “검둥이, 중국놈, 아일랜드 놈은 어떠하다고 보는 선입견”이 문제이며, “여자의 존재 자체보다 그 사진을 더 좋아하고 그 몸만을 중히 여기는” 식으로 사람을 “사용해야 할 도구로 보는 것”이 문제다. 이를 ‘추상화’라고 표현하는 저자는 해법으로 “구체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역사 이전의 사람들이 가졌던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청한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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