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쇼크 이전인) 지난해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데 똑같은 내용을 입법 예고하고, 건의는 하나도 수용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거죠. 꼭 이래야 하는지….”(재계 관계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은 노동계에서 ‘노사관계의 뇌관’으로 불린다. 실업자·해고자 노조가입 허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타임오프제) 폐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 연장 등 노사의 이해관계를 직접 건드리는 내용이 대거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23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ILO 3법’ 개정을 강행하자 재계는 ‘원 포인트 사회적 대화’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나섰다. 노동계는 “재계가 합의할 의지가 없다”며 선을 그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가뜩이나 첨예한 노사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안대로 재추진되는 ILO 핵심협약 비준=이날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부가 아직 비준하지 않은 ILO 핵심협약 4개 조항은 87호(경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 29호(강제노동 협약) 105호(강제노동의 폐지에 관한 협약)다. 이 중 105호는 정치적 의사에 따른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과 상충될 우려가 있다. 정부는 이를 제외한 세 가지 협약의 비준을 추진하고 있다.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기 위해서는 노동법 개정이 불가피하다. 정부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만든 수정안이다. △실업자·해직자의 노동조합 가입 허가(노조법·공무원노조법) △타임오프제(노조 전임자 급여지급 금지. 노조 전임자는 근로자 상담 역할을 하고 사용자가 임금지급) 폐지(노조법) △공무원노조 가입범위 삭제(공무원 노조법)이 큰 줄기다.
다만 경사노위 협의 과정에서 사용자위원의 반대가 이어지자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상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사업장 내 생산 및 주요 업무 시설을 점거하는 형태의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내용(노조법)이 포함됐다.
◇노사 지난해도 “반대”, 지금도 “반대”=정부는 지난해 5월 입법 계획을 밝히고 같은 해 10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20대 국회로 넘겼다. 하지만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동폐기됐다. 노사 반대가 워낙 첨예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재계 단체는 실업자·해직자의 노조 가입은 강성노조의 활동을 부추기고 타임오프제의 폐지는 노조 활동에 대한 기업의 부담을 늘릴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노동계는 ILO 핵심협약 비준은 노동권의 향상을 위한 것이지 사용자와의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상황은 지난해와 다르지 않다. 고용부는 법안의 수정이 노사 간의 분란을 조장할 수 있다며 20대 국회 종료로 폐기된 법안을 그대로 국무회의에 상정·통과시켰다. 하지만 지난달 말 고용부가 입법 예고 안을 내놓을 때부터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노동기본권의 후퇴라고 지적했고, 경총·한국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사용자의 노사관계 대응력이 더욱 약화돼 노사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고 노사 간 갈등만 고조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불에 기름 부은 정부…더 꼬여버린 노사관계=재계는 노동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재계는 원 포인트 사회적 대화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경총 관계자는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 극복과 기업의 경쟁력 회복에 매진해야 하는 시점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는 것은 큰 충격”이라며 “경영계는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화’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장 코로나19로 기업의 경영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이고 지난해와 달리 유럽연합(EU)의 비준 압박도 거세지 않은데 왜 지금 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느냐는 것이다.
노동계도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재계가 고용위기와 관계없는 상황까지 주장해 진전이 없는데 혹 하나 떼자고 했더니 혹 하나 더 붙인 꼴”이라며 “사회적 대화를 하지 말자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한국노총 관계자도 “사회적 대화에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황을 자꾸만 끌어들이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지적했다.
결국 21대 국회에 관련 법안이 상정돼도 통과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고용부는 20대 국회 종료로 폐기된 ILO 핵심협약 비준안도 다음달 초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21대 국회에 제출한다는 방침이다.
/변재현·허진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