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위기 상황이다. 미래 기술을 얼마나 빨리 우리 것으로 만드느냐에 생존이 달려있다.”-(6월 19일, 화성 반도체 연구소)
“경영환경이 우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자칫하면 도태된다. ”-(6월 23일, 수원 생활가전사업부)
최근 현장 경영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의 발언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초미지급(焦眉之急· 눈썹이 타게 될 만큼 위급한 상태)’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고 할 정도로 위기의식이 발언 곳곳에 묻어난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발언이 단순 엄살이 아니라고 말한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코스피 상장 기업 전체 영입이익의 27% 가량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결국 삼성전자의 위기가 한국경제 전체의 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삼성전자를 둘러싼 ‘트리플 파고(波高)’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어 향후 한국경제 전체가 휘청일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코로나19에 휘청이는 삼성의 주력사업 |
24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둘러싼 첫번째 위기는 꺾이지 않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다. 코로나19는 이달내로 감염자 수 1,000만명 돌파가 확실시 될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국의 양대 수출 시장인 중국과 미국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잇따른 공장가동중단(셧다운) 및 소비 위축으로 신음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인 가전과 스마트폰 시장의 위축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무역협회 측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가전 부문은 스포츠 이벤트 취소 등으로 글로벌 수요감소 불가피하다”며 “스마트폰 등 무선기기는 인적·물적 이동 제한과 구매력 감소 등으로 수요가 둔화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코로나19 장기화로 흔들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코로나19에 따른 이른바 ‘언택트’ 수요로 반도체 가격 상승을 기대했지만 “반짝 수요가 끝났다”분석이 나온다.
실제 코로나19로 수요가 급증했던 서버용 반도체(DDR4 32GB)의 고정가격은 지난달 143.1달러를 기록해 전달과 같았다. 가격 상승 추이가 멈춘 셈이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클라우드 업체들이 D램 수급 차질을 우려해 올 상반기 반도체 구입을 늘렸지만 각종 물류 이동 제한 등으로 서버 증설에 어려움을 겪으며 재고를 충분히 소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클라우드 업체들이 올 하반기에는 D램 구입량을 줄일 것이란 예측이 나오면서 가격 상승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PC용 반도체(DDR4 8Gb)의 현물가격은 지난 23일 1개당 2.82달러를 기록하며 지난해 말 수준으로까지 뒷걸음질 쳤다. PC용 D램 현물 가격은 최근 두달새 20% 이상 떨어졌다. 현물가격은 고정거래가격의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PC용 D램 가격 추이 또한 하향세로 바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D램 최대 수요처인 모바일용 D램은 스마트폰 시장 위축으로 전년 대비 전체 매출규모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의 3개 사업부서인 CE·IM·DS 모두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셈이다.
미중 무역분쟁에 '선택' 강요당하는 삼성 |
삼성전자를 둘러싼 두번째 위기는 미중 무역분쟁이다. 미중 무역분쟁은 글로벌 교역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수출중심의 한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삼성전자는 여기에 더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까지 강요당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산 설비를 바탕으로 생산한 반도체를 중국 화웨이에 공급하지 못하도록하는 내용의 ‘화웨이 규제안’을 조만간 실행에 옮길 예정이다. 화웨이는 삼성전자의 ‘5대 매출처’에 2년여 동안 이름을 올린 주요 고객사다.
삼성전자의 고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달에는 대만 TSMC가 미국 현지 파운드리(반도체위탁생산) 공장 건설에 12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미중 무역분쟁이 파운드리 영역까지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국은 TSMC 측에 화웨이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생산을 하지 말도록 강제하는 등 화웨이 고사(枯死) 작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또한 미국 견제 때문에 향후 화웨이 제품 수주가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등의 세계 정상급의 반도체 장비 업체를 보유하고 있어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세계 유일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공급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 또한 미국 업체인 싸이머(Cymer) 인수를 통해 관련 기술을 취득했다는 점에서 미국 제재시 관련 장비 납품이 불가능하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 또한 미국 내 파운드리 시설 증설로 미국 정부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국우선주의’에 힘쓰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어떻게든 삼성전자의 팔을 비틀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평택에 극자외선(EUV) 기반 파운드리 라인 조성을 위해 수십조원을 쏟아붓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지출이 발생할 수도 있는 셈이다.
중국의 IT 굴기에.. 숨가쁜 삼성의 미래 |
삼성전자를 둘러싼 세번째 위기는 중국의 ‘IT굴기’다. 삼성전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액정표시장치(LCD) 기반의 디스플레이 시장은 중국의 BOE, CSOT 등에 넘어갔으며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에서도 한국을 맹추격 중이다. TV시장에서는 TCL, 하이센스, 샤오미 등이 삼성전자를 맹추격 중이며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샤오미, 화웨이, 오포, 비보 등의 합산 점유율이 삼성전자를 크게 웃돌고 있다. 5G 통신 장비 시장은 자국 정부의 ‘묻지마 지원’을 등에 업고 성장한 화웨이의 기술력이 삼성전자보다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우려가 높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D램 시장에서는 CXMT가 연내 17나노급 D램을 양산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YMTC는 128단 낸드플래시 제품을 올 연말께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올 1·4분기 실적 공개 자리에서 “올해 설비투자액(CAPEX)으로 43억 달러를 집행하겠다”고 밝히며 현재 주력인 14나노 공정을 7나노 공정으로 ‘퀀텀점프’ 하기위해 애쓰고 있다. 중국은 또 화웨이 제재로 차질이 생긴 시스템반도체 육성 로드맵을 칭화유니그룹의 자회사 유니SOC를 통해 우회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 경영권과 관련한 검찰 수사로 발빠른 판단과 초격차에 기반한 삼성 특유의 ‘오너 경영’이 힘을 못쓰는 모습”이라며 “일각에서는 ‘삼성이 망한다고 대한민국이 망하냐’는 말을 하지만 삼성이 없다면 최소 수십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코스피 지수가 3분의 2 수준으로 폭락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