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북촌에 위치한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실에는 책과 그림이 가득했다. 연필로 끄적거리는 낙서처럼 공간의 소소한 물건들과 작가의 작품들이 기자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베란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노준구 작가는 한국에서 광고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석사과정을 밟았다. 여러 단행본과 매거진, 음반, 기업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다양한 그룹전과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일러스트 기반의 작업을 주로 진행하고 있으며, 종종 대학에 강의를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작업실 이야기-따스한 북촌을 닮은 베란다 공간
Q.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학부 시절부터 드로잉 기반의 작업들이 많은 편이었어요. 지금의 제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느낌과는 많이 달랐지만요. 틈틈이 습작을 모아서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도 꾸렸었는데, 우연히 대학교 4학년 때 제 작업을 보시고 클라이언트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12명의 작가와 함께 협업해서 다이어리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죠. 과제하듯이 일을 하면서도 너무 즐거운 거예요. 제가 흥미를 느끼는 일을 적절한 보수까지 받으면서 작업하다 보니 무척 행복했죠. 그래서 그 시점부터 일러스트레이션 쪽으로 전공을 좁혀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Q. 유학시절에 관한 얘기가 궁금합니다. 공부하던 영국 학교의 교육 시스템이 한국과는 어떻게 달랐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당시 한국에서는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만 전적으로 다루는 전공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제가 유학을 결심했을 때 은사님께서 디자인 역사가 깊은 영국을 추천해주셔서 킹스턴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요.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유명한 학교이다 보니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했고, 덕분에 자연스레 다양한 문화와 시각을 경험할 수 있었지요. 각자의 작업에 대한 평론을 할 때나 피드백을 줄 때도 굉장히 표현이 자유롭더라고요. 덕분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만큼 저에겐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죠. 한국에서 공부한 것들이 제 작업의 주춧돌이었다면, 영국에서 공부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은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Q. ‘베란다 스튜디오’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사실 ‘베란다’는 카페에서 판매하는 원두 이름이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영문 글자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베란다 스튜디오’로 정하고 나중에 의미를 생각을 해봤죠.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는 책이 가득한 공간의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제가 평소 상상하고 있던 이미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스튜디오와 함께 ‘베란다북스’라는 서점도 운영을 했었는데 서점과 스튜디오 두 곳에 모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무척 마음에 듭니다.
Q. 북촌 근방에 자리 잡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베란다북스’를 구상하고 난 후 서점이 어울릴만한 동네를 떠올려봤는데, 제 마음 한편에는 늘 북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서점을 운영하게 되면 아내와 함께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었거든요. 이런 생각으로 동네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5년 차가 되었네요. 원래도 좋아하던 곳이긴 했지만 거주지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서점을 운영하고자 했던 목표가 저희 가족을 북촌으로 이끌었던 셈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베란다북스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엔 오픈과 동시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역사회 커뮤니티도 만들고 주도적으로 책의 출판과 판매도 함께 진행하기도 했죠. 단순한 동네 책방이 아니라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 그런 기분 좋은 장소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강의나 외부적인 업무를 함께 하게 되면서 너무 바빠지다 보니 서점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서점을 접어야 할 때 굉장히 좀 아쉬웠죠.
Q. 동네 근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A. 저희 서점이 있을 때 인터뷰를 진행했다면 바로 자신 있게 베란다북스 서점이라고 말했을 텐데요(웃음). 지금은 근처에 삼청공원과 그곳에 위치한 ‘숲 속의 작은 도서관’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평소에 저희 딸과 함께 산책을 많이 다니는 곳들이죠.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이 동네가 저는 참 좋아요. 저희가 가게를 운영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동네 주민분들도 참 많은데요. 가끔 그분들과 같이 만나서 밥도 먹고 술 한 잔도 나누고, 이런 것들이 소소하니 무척 좋네요.
Q. 일러스트레이터는 디자이너와는 달리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보다는 프리랜서 형태로 업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직업 같은데요.
A. 저는 항상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니고 탐색하기를 좋아했어요. 주의에서 역마살이 끼었다고 할 정도로요(웃음). 사실 이런 성향이다 보니 여행을 가장 많이 다닐 수 있는 직업이 뭘까 고민해본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환경디자인, 퍼블릭 디자인 쪽을 고려해본 적도 있었으니까요. 일러스트레이터는 특히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 저의 성향과 잘 맞는 직업인 것 같아요. 반면에 혼자 활동하다 보니 책임져야 할 것들도 많고, 이런 업무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늘 긴장감을 가지고 지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부담감도 살짝 있죠. 하지만 여전히 전에 스캐너를 싸 들고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좋게 남아 있습니다.
◇작업 이야기 -일상을 기록하는 여행
Q. 초현실주의 느낌의 일러스트 작품이 많은데 주로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A. 먼저 저는 일러스트레이터이기 때문에 작업을 의뢰받은 작업과 개인작업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요. 작업과정은 개인작업하듯이 의뢰받은 작업을 진행할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영국서 공부할 때 영감을 받은 부분이 많았어요. 고대 이집트 벽화 회화도 좋아했었고요. 마음에 드는 작가의 사진집을 보는 것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사진 작업이 영화처럼 앵글 안에 고도로 모든 것들이 연출된 듯한 분위기의 스타일이어서 눈길이 갔죠. 그런 장르의 극화된 그림을 그려보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제 그림 안에서도 무대를 세팅해놓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적당히 딱딱하고 희화적으로 보이도록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집트 벽화처럼 옆모습 위주로 그린다거나, 중세 종교화처럼 하나의 그림인데 다양한 구도의 요소들이 공존하는 형태로도 그려보았고요. 결국엔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사조의 그림들과 사진작가들의 이미지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Q. 학부시절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셨나요?
A. 네 많이 달랐습니다.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유학을 갔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저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학부 때 작업했던 팬시하고 트렌드를 반영한 스타일의 그림보다는 조금 더 깊이감이 있는 스타일을 갈망했어요. 그래서 유학 가서 스타일 연구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생성된 스타일이 저만의 양식이 되었고, 이런 스타일들을 보시고 연락 주시는 클라이언트분들이 많았어요.
Q. 연필 드로잉이 베이스인 작업들이 많아 보이는데 특별히 연필을 도구로 선호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A. 영국에서 제 스타일을 만들려고 할 때 항상 연필이 제 곁에 있었어요. 연필과 함께 아크릴물감과 과슈 등의 재료들도 사용했었습니다. 기본 드로잉은 연필을 주로 사용했고 재밌는 부분은 컬러로 강조했죠. 물론 컬러를 많이 쓰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연필의 모노톤과 대비되는 아크릴물감의 플랫하고 쨍한 컬러가 굉장히 좋더라고요. 이때 발견한 양식이 자연스럽게 스타일화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제 그림을 보시면 정적이고 차분해 보이면서도 절제되어 보이는 느낌이 있습니다.
Q. 클라이언트의 작업을 진행할 때 작가로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 같은 것들이 있을까요?
A. 보통은 저의 기존 작업들을 보고 요청이 들어오기 때문에 크게 갈등이나 문제는 없었던 것 같고요. 요구 사항들도 들어보면 ‘아 왜 나에게 의뢰를 했는지 알겠다’싶은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의뢰받은 작업은 내 작업이 아니라 상품성을 가진 작업들이기 때문에 너무 개성을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작업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양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도출되는 상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죠. 예전에는 제 작업에 대한 고집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유연하게 소통하면서 진행을 하고 있어요.
Q. 가수 윤종신씨와 함께 작업했던 일러스트 작업이 인상 깊은데요.
A. 2013년에 가수 윤종신씨의 ‘월간 윤종신‘ 표지 작업에 작가로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윤종신씨와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씨가 또 다른 일러스트 작가들을 섭외해서 진행된 프로젝트인데요. 작업을 함께 진행하면서 출판 분야와는 또 다른 매력을 느꼈었어요. 컬래버레이션 작업뿐 아니라 연말에 전시도 하고 윤종신씨가 작은 공연도 기획하셨었거든요.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벤트와 함께하다 보니 좀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가수와 일러스트 작가들이 함께 앨범 표지 작업을 진행한 것이 어떻게 보면 저희 분야와 작가들에게도 좋은 프로모션의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Q.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작업을 꼽아본다면요?
A. 최근에 다른 부분에도 에너지를 나눠서 쏟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오롯이 작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는데요. 결과물들을 봤을 때 아쉬운 마음이 조금씩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하고 싶은 작업은 ‘Hello Stranger’라는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입니다. 풍경은 다 달라도 결국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하고, 그 모습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림으로 옮겨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이동하거나, 기가 막힌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뷔페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 등이 늘 제가 담고 싶은 주제이고 애착이 가는 풍경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풍경을 담은 작업들을 계속해서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두 번째로는 제가 유학 생활 시절 여행을 떠나면서 그렸던 ‘모로코 재구성 시리즈’가 있는데요. 모로코에 약 삼 주간 과제도 할 겸 여행을 갔었거든요. 제가 잘 하는 것을 여행 기간 동안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습니다. 당시 연극적인 그림에 한창 빠져있을 때라 사진을 통해 기록한 것들을 짜집기해서 가상의 모로코 동네를 만들어보고자 했죠. 그래서 목욕탕과 식당 PC방 식당 등을 재구성했었어요. 모로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유머러스하게 희화화하여 담았습니다. 당시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그 모든 과정이 저에겐 무척 소중한 하나의 작업인 셈이었어요. 모로코 시리즈는 지금 다시 봐도 참 잘 그렸고, 그때의 감정들과 열정이 고대로 담겨있는 것이 느껴져서 매우 애착이 가요. 자유롭고 온전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잊히지가 않네요. 작업 환경이 결과물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앞으로 제게 그런 환경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질지는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의 이야기-끊임없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
Q.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작업을 진행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일러스트 꿈나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학교에 강의를 나가다 보면 일러스트 실력이 좋은 학생들이 참 많은데요.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도 다른 사람과 함께 협업하는 형태로 진행이 많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일도 일이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적인 관계와 교류를 쌓아간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센스도 필요한 것 같고요. 물론 처음부터 잘하긴 어렵죠. 하지만 되돌아보니 저도 능숙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더 언급하게 되는 것 같네요. 수정 요청을 받았을 때도 예민하게 굴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해가면서 협업하는 스킬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너무 작가주의에 빠져서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것이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을 신경 쓰다 보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Q.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자기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텐데요. 작업자로서 색깔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A. ‘개성’, ‘자기다움’을 찾고, 그것들을 내가 만든 결과물에 잘 녹여서 작품군을 늘리고, 또 하나의 집을 짓고, 세계를 만드는 것이 타인에게 자기의 개성으로 읽히고… 다 맞는 말인 것 같은데요. 일본에 유명한 디자이너 중에 ‘사토 다쿠’라는 분이 개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개성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존재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항상 바뀌기 때문에 개성이라는 것을 쫓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자기다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맞는 것일까? 그 책을 읽고 나니 개성을 계속 찾는다는 것이 어쩐지 굉장히 어색한 형국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찾았다 하더라도 과연 저게 정말 온전한 내 것일지. 정말 나에게서 나온 개성일지. 어디서 무의식적으로 본 것을 통해 발현된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에 임할 때 작가는 끊임없이 ‘자기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바뀌는 나에게 집중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하는 태도가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 제가 벌려놓은 일들을 시간 안에 잘 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주제로 책을 만들 계획이 있는데요. 역시나 출판과 관련된 욕심이 있어서 이번에도 잘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