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쯤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줄 섰던 뒤로, 이렇게 기다려서 전시 보기는 처음이네요.”
화창한 토요일 아침인 11일 오전. 한혜정(40) 씨는 친구와 함께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 앞에 줄을 섰다. 개관 시각인 10시 이전이었지만 이미 긴 줄이 늘어져 한 씨는 재빨리 푸른 차양 아래 자리를 잡았다. 긴 줄은 지난 5월 15일 개막해 2개월의 전시기간을 끝내고 12일 막 내리는 화가 김보희의 대규모 개인전 ‘Towaeds’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국내 생존작가 개인전으론 7~10배 관람객
31년 역사의 금호미술관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 한국인 생존화가의 개인전이 30분 이상 줄을 설 정도로 기다려 관람하는 일은 국내 미술계 전체를 통해서도 드문 일이다. 지난해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나 앞서 개최된 고흐·샤갈·마티스 등 해외 거장의 전시, 팀 버튼이나 픽사·디즈니 등 이름값을 자랑하는 대규모 블록버스터 전시에서나 볼 법한 일이다. 명품 서화의 보물창고로 1년에 딱 두 번만 문 여는 것으로 유명한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전시, SNS를 통한 홍보와 ‘핫플’로 이름난 한남동 디뮤지엄의 기획전 정도라야 관람객이 줄 서는 노고가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60대 국내 작가의 개인전이며, 미술관 측의 SNS 홍보는 전혀 없었다. 전시 초반에 미술계 전문가층의 평가가 좋았고, 다녀간 관객들이 ‘사진빨 잘 받는’ 작품을 자발적으로 SNS에 게시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5월에는 서서히 관람객이 늘었고 지난달부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생활 속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와중에도 전시장이 북적였다. 배우와 가수 등 연예인 관람객도 보이기 시작했고,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의 RM도 지난 6월20일에 전시장을 다녀간 후 SNS를 통해 작품 앞에 선 자신의 뒷모습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관람객이 많은 것은 반길 일이나, 미술관 측은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입장 시 손 소독 등 방역과 발열 체크, 방문 명부 작성 등의 과정을 거치고, 관람객들이 최소 1.5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게 관리하는 것 또한 입장 정체의 이유 중 하나다. 금호미술관의 김윤옥 수석큐레이터는 “올 초부터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휴관과 재개관을 반복한 터라 이번 김보희 작가 초대전을 개막하고도 전염병 확산 추이에 따라 언제든 ‘휴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서 “팬데믹 상황이라 ‘관람하러 오시라’고 적극 홍보하기가 조심스러웠고, 기대 이상으로 관람객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오시지 마시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기쁘면서도 난감하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미술관 측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전시장 내 관람거리 유지와 입장 시 방역활동이다. 최근에는 한낮의 강한 햇빛과 갑작스런 비를 피할 수 있는 야외 가림막을 설치했다. 지난해 큰 관심을 끈 바우하우스 전시 등 디자인 기획전으로 상당한 관람객을 모은 바 있는 금호미술관이지만, 대기 관객을 위한 외부시설을 마련한 것 또한 처음인 일이다.
김 큐레이터는 “입장객을 분산시키고 밀집을 제한하는 상황이라 관람객 추이를 비교하는 게 어렵지만 금호미술관이 개최한 국내 생존작가 개인전으로는 7배 이상 10배 가까운 수치”라면서 “50~100명 오던 관객이 500~1,000명으로 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미술관이 김보희 작가의 작품 이미지로 제작한 아트포스터는 이달 초부터 판매를 시작해 3일만에 전량 매진됐다. 미술관은 서둘러 다른 작품 이미지로 2종의 포스터를 추가 제작했는데 이 또한 잔여량이 적은 상황이다.
■인기비결-자연, 치유, 일상
그렇다면 왜 이렇게 ‘김보희 전시’가 인기일까? 그의 작품은 지난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트럼프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환담할 당시 현장에 걸려 눈길을 끈 바 있다. 하지만 당시의 화제성과 지금의 인기는 확연히 다르다.
김윤옥 큐레이터는 “지난해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에 대한 인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을 소재로 한 구상회화에 대한 막강한 수요와 수요층이 생겨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3~8월 열린 호크니 전시에는 37만5,000여 명이 다녀갔다. 개념미술 위주의 현대미술, 단색조 회화 등 추상미술이 미술계의 주류인 것에 반해 관람객이 편안하게 보고 보는 즉시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구상미술’에 대한 수요가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미술관 기획전으로는 이례적으로 ‘승률 높은 히트’를 기록한 디뮤지엄의 전시도 일러스트,사진 등 구상성과 감각적인 공감대가 강조됐다.
김보희 작가가 소재로 삼은 ’일상’과 ‘자연’은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잃고 있던 것들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수개월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콕’ 직후였던 지난 5월, 전시가 개막했을 당시 관람객들은 초록의 숲, 푸른 바다를 그림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치유를 얻는다고 했다. 위무(慰撫)와 공감능력의 확장은 예술의 핵심적 기능 중 하나다. 거실 앞 테라스와 정원, 나무와 바다 등의 일상과 자연은 특별한 설명없이도 누구나 공감하게 충분하다. 더욱이 김 작가는 작업실이 있는 제주 풍광을 주로 그리기에 여행과 이국적 풍광이 그리운 사람들의 떠나고 싶은 열망을 건드리기도 했다.
또 하나 인기비결은 ‘그림의 맛’과 ‘눈의 즐거움’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김보희 작가의 특기는 섬세한 관찰력과 이를 표현하는 세필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놀라움과 일깨움을 주는 주류 현대미술과는 또다른 방식의 감흥이다. 관객들은 작가의 반복적인 붓놀림이 이뤄낸 붓질의 흔적과 행위의 축적에서 본능적인 끌림과 울림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인 심상용 서울대 교수는 평론에서 김보희의 회화를 “땅을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 그 터전이 주는 생명력과 함께하는 행복의 이야기”라며 “회복과 치유의 해독된 풍경”이라 평했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