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년 7월14일, 영국 포츠머스. 레지널드 브레이 경이 조선소 건설공사의 첫 삽을 떴다. 국왕 헨리 7세의 측근으로 성조지 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 헨리 7세 예배당을 설계했던 브레이가 도면을 그리고 공사를 추진한 새 조선소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른 조선소와 달랐다. 첫째는 왕실 직영. 장미전쟁에서 랭커스터 가문을 누르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가 돈을 댔다. 즉위 10년을 넘기며 왕권에 도전하는 반란을 잇따라 제압, 자신감이 붙은 헨리 7세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해군력 확충에 두고 조선소 건설과 전함 건조를 서둘렀다.
두 번째 다른 점은 땅을 팠다는 것. 이전까지는 배를 육상에서 완성한 후 통나무를 깔아 강이나 바다에 진수했다. 브레이는 초대형 욕조처럼 땅을 파고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기반을 다졌다. 바닥에 목재를 깔고 측면에는 판자와 석재를 붙인 뒤 바다를 향해 육중한 나무 갑문 두 개를 달았다. 이듬해 4월 공사가 모두 끝나고 영국 최초의 드라이 도크(dry dock)가 선을 보였다. 기원전(BC) 2세기 이집트와 중국 송나라(1068)에서 운영했다는 드라이 도크가 영국에서 근대의 개막과 함께 다시 등장한 것이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시설인 선거(船渠)는 드라이 도크와 부유식 도크(floating dock) 두 가지가 있으며 통상 ‘도크’는 전자를 뜻한다. 그만큼 드라이 도크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헨리 7세가 포츠머스에서 공사를 시작할 때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이듬해 4월에 끝난 공사에 들어간 총비용은 193파운드. 오늘날 가치로 380만파운드에 이르는 거금으로 대형 전함 한 척을 건조하는 비용보다 많았다. 당연히 반대론이 들끓었으나 곧 수그러들었다. 노동 효용성이 높아지고 건조단가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도 길이 120.4m, 깊이 6.7m인 포츠머스의 ‘신식 선거’를 경쟁적으로 베꼈다.
헨리 7세에게 대형 전함 7척을 물려받은 헨리 8세는 24척을 더 뽑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세계의 바다를 누볐다. 도크를 잇따라 확충한 영국이 19세기 이후 포츠머스에 건설한 군용 도크만 19개에 이른다. 10개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최초의 드라이 도크가 있던 자리는 부두로 바뀌어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탔던 빅토리호(1778년 취역, 세계 최고령 현역 함정)가 정박하고 있다. 도크 얘기에는 한국도 빠지지 않는다. 울산 현대중공업에 세계 최대인 100만톤급 드라이 도크가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