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장안은 사회인이라면 낯설지 않은 ‘종합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다. 사회적 동물인 인류가 오랫동안 다듬어온 하나의 규범인 이 예술적 행위는 국가와 국가가 만났을 때 예의를 지키자는 데서 출발했다. 여러 국가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어느 국기부터 꽂아야 할지, 누가 상석에 앉을지 고민하느라 고통받았을 누군가를 위해 탄생한 실무적 행위는 어느 순간 실무의 적(敵)으로 떠올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러나 상사를 소탈한 인물로 추켜올려야 하는 행위가 부하들에게 독심술과 같은 업무 외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밑에서 완벽히 진행되는 이 행위는 수많은 사회인의 고민이기도 하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는 단 한 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뭇 조직에는 임금님이 여럿 계시기 때문이다. 장대비를 막아주는 우산, 보폭에 맞춰 대기 중인 엘리베이터, 만차에도 빈 주차 자리, 회의실까지 순간 이동한 만년필 등은 완성도를 높이는 가점 요소다.
사물이나 공간만 예술에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또 연령이나 연차가 행위 제공자와 대상자를 가르는 기준도 아니다. 전무님도 대표이사님과 오너가(家) 3세 실장님 앞에서는 이 조직적 예술행위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동원되는 장기알일 뿐이다. 전무가 부하들과 다른 점이라면 행위에 영혼을 채운다는 정도다. 기업만 그러는 게 아니다. 정부부처나 공기업에 속한 이들은 “우리가 종합예술 끝판왕”이라고 자조한다.
예술적 경지로 확장된 ‘의전’에 문제의식을 지닌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우리 사회는 올해 7월을 뜨겁게 달군 유명 정치인의 사망을 두고 완전히 쪼개졌다. 진영논리와 페미니즘, 각자 생각하는 이유는 달랐지만 분열의 밑바탕에는 ‘올바른 의전’을 규정하는 개개인의 철학이 있다. 그 철학에 의문을 제기하자 “성웅(聖雄)과 관노”를 엉뚱하게 꺼내거나 “후레자식”이라 일갈하는 누군가는 중독성 강한 예술에 흠뻑 취해있다고 감히 판단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