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21일 현대자동차 남양기술연구소를 방문해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수석부회장과 ‘미래차 비전’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업계에서는 이들 업체간 협업이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테슬라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 지 주목하고 있다.
21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날 현대차 남양연구소를 방문해 정 수석부회장과 만난다. 이번 회동의 명목은 정 수석부회장이 지난 5월 삼성SDI(006400) 천안사업장을 찾아 이 부회장과 차세대 배터리 협력을 논의한 데 대한 답방 차원이다. 이 부회장과 정 수석부회장은 앞서 5월 회동에서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 등 양사 협업 방안과 미래 배터리 사업에 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반면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과 정 수석부회장 간 2차 회동으로 삼성과 현대차 간의 미래차 협업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기한다. 경기 화성시에 위치한 남양연구소는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R&D) 심장부’로 불리며 R&D·디자이너 등 직원 1만여명이 일하고 있어 사업상 논의가 진행될 최적의 장소로 분류된다.
무엇보다 삼성은 자율주행차에 탑재되는 시스템반도체를 비롯해 전장·메모리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부문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졌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 연간 전기차 판매대수를 100만대로 늘려 전기차시장 점유율을 10%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이들 업체간 시너지가 상당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현대차, 테슬라 대항마 되나=현재 전기차시장은 자동차 업계 시가총액 1위인 미국 테슬라가 주도하고 있다. 테슬라는 배터리 자체 생산을 계획 중인데다 경쟁 업체를 압도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오토파일럿’ 기능을 통해 향후 전기차시장을 독점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테슬라 대표인 일론 머스크는 우주개발기업 ‘스페이스X’와의 시너지를 통해 미래차 시장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스페이스X는 위성인터넷 프로젝트 ‘스타링크’를 추진 중이며 이를 통해 1GB 용량의 영화 1편을 8초만에 내려받을 수 있는 1Gbps 속도의 통신서비스를 전세계에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일각에서는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의 자율주행 서비스를 위한 통신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스타링크를 추진 중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테슬라는 또 중국 CATL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한국 배터리 3사’가 주도하고 있는 배터리 시장 판도를 뒤집겠다는 계획이다. CATL은 기술력이 떨어지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중국 내수향 테슬라에 공급한다. LFP 배터리는 출력이 낮은 반면 가격이 저렴해 중국 시장에서 제품 라인업 확장에 나선 테슬라의 선택을 받았다. 테슬라는 앞선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을 바탕으로 배터리 효율을 최적화 해 같은 배터리를 쓴 여타 전기차 대비 주행시간이 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테슬라와의 협업으로 CATL의 기술력이 빠르게 업그레이드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반면 세계 최고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업체인 삼성과 수소차를 비롯해 미래 자동차시장에 ‘올인’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이 손잡을 경우 ‘테슬라 독주 체제’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7년 글로벌 1위 전장업체인 하만을 인수한 후 자동차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 오토’를 출시하는 등 관련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삼성SDI는 내년부터 주행거리 600㎞ 이상, 에너지 밀도는 20% 이상 높인 5세대 배터리(젠5) 양산에 나서며 관련 시장 점유율 확대를 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수소차와 전기차 ‘투트랙’ 전략을 통해 미래차시장에 대비하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4일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에서 “현대차그룹은 현대·기아·제네시스 브랜드로 2025년까지 23차종 이상의 전기차를 내놓을 계획이며 2025년에는 전기차를 100만대 판매하고 시장 점유율을 10% 이상 기록해 전기차 부문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기차 가격의 40% 가까이를 차지하는 배터리 외에 전장,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반도체 부문 선두 업체인 삼성과의 협업이 필수다. 이미 글로벌 전기차시장에서는 도요타-파나소닉, GM- LG화학, 폭스바겐-SK이노베이션 등 완성차와 배터리 업체 간 합종연횡이 본격화되고 있다.
금일 회동에서는 1차 회동의 핵심 주제였던 전고체 배터리와 관련한 추가 협업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는 2030년께나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일본 도요타의 기술력이 가장 앞서 있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지만 삼성과 현대차그룹 간 협력으로 격차를 빠르게 좁힐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2018년 미국의 배터리 전문 스타트업인 ‘솔리드파워’에 투자하는 등 전고체 배터리에 꾸준히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삼성-현대 자율주행 동맹 탄생하나=양사의 협업이 향후 자율주행차시장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두 그룹 총수의 회동 장소가 자율주행차 등 신기술을 연구하는 남양기술연구소라는 점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삼성전자는 테슬라의 자율주행 시스템인 ‘하드웨어(HW)3’에 ‘엑시노스’칩을 제공하며 관련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9월 미국 자율주행 전문기업 ‘앱티브’와 40억달러 규모의 자율주행 조인트벤처 설립 계획을 발표할 정도로 자율주행 기술 확보에 적극적이다.
특히 자율주행시장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테슬라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양사의 협업이 필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테슬라는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모델S·모델3·모델X·모델Y 등에서 확보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50억㎞ 규모의 주행 데이터를 수집한 것으로 전해졌다. 후발주자인 삼성·현대차로서는 양사의 시너지 효과를 통한 기술 고도화 외에 격차를 좁히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번 회동 이후에도 삼성전자와 테슬라 간의 ‘프레너미(Frenemy)’ 관계가 이어질 지 여부도 관심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테슬라의 자율주행 시스템인 ‘하드웨어(HW)3’에 ‘엑시노스’ 칩을 제공하고 있다. 테슬라는 HW1에 인텔의 자회사인 모발아이의 칩을 썼으며 HW2와 HW2.5에는 세계 최고의 그래픽장치(GPU) 기업인 엔비디아의 칩을 사용했다. 반면 지난해 4월 출시된 HW3에는 테슬라가 삼성전자와의 협업을 기반으로 만든 자체 칩을 탑재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사업부도 테슬라에 D램 등을 납품하며 수익을 내고 있다. 테슬라의 HW1에는 256MB 크기의 D램 하나가 장착된 반면 HW3에는 8GB 크기의 D램 2개가 장착돼 있다. HW1이 2014년 출시됐다는 점에서 5년 만에 자율주행차에 탑재된 D램 용량이 64배나 늘어난 셈이다. 테슬라가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지금보다 한층 끌어올릴 경우 양사 간 ‘프레너미’ 관계는 ‘슈퍼갑(테슬라)’과 ‘슈퍼을(삼성전자)’ 관계로 바뀔 수 있다. 일론 머스크는 부품업체 ‘가격 후려치기’를 통해 수익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배터리 부문의 오랜 협력관계인 일본 파나소닉간의 결별설 또한 일론 머스크의 무리한 가격 인하 요구 때문으로 알려졌다.
정 수석부회장과 SK·LG그룹 총수 간의 2차 회동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4일 청와대 행사에서 “최근 삼성·LG·SK를 차례로 방문해서 배터리 신기술에 대해 협의했으며 서로 잘 협력해 세계 시장 경쟁에서 앞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전기차 배터리시장이 향후 ‘공급자 우위’ 시장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만큼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LG화학·SK이노베이션과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시장조사기관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공급량은 지난해 326GWh로 수요 예측치인 190GWh와 비교해 ‘공급 과잉’ 상태이지만 오는 2023년에는 수요량이 916GWh로 공급량 776GWh을 넘어서는 ‘수요 과잉’ 상태가 될 전망이다. 2025년 배터리 시장 규모는 1,670억달러로 메모리반도체 시장(1,500억달러)을 넘어설 것으로 보여 한국 경제의 ‘포스트 반도체’ 역할을 할 핵심 산업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