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붕괴한 벽 앞에 환호한 것은 독일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서방의 자유와 번영을 동경해온 동유럽과 소련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사회학자들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수 개월 전에 쓴 글을 떠올렸다. 후쿠야마는 중국과 소련의 정치·경제 개혁은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서방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종점”이라는 말로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일면 맞는 듯했다. 장벽 붕괴 효과는 동유럽으로 빠르게 전이됐다.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피 흘리는 투쟁 없이 공산 정권을 몰아냈다. 소비에트 연방이 와해하면서 미소 대결이라는 초강대국 간 경쟁 구도는 막을 내렸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에 나오는 꽃 파는 아가씨 같은 극적인 변신을 꿈꿨다. 음성학 교수의 특별 교육을 통해 거친 사투리를 고치고 세련된 상류층 여성으로 탈바꿈한 아가씨처럼 그들도 자유민주주의 세례를 받고 ‘잘 나가는’ 서방 세계처럼 변모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장밋빛 꿈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세상은 안다. 심지어 불가리아 정치학자 이반 크라스테프와 스티븐 홈스 뉴욕대 교수가 함께 쓴 책 ‘모방 시대의 종말(원제 The light that failed)’은 그들이 지금 ‘피그말리온’ 대신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냉전의 종말이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은 아니었음을 지적하면서, 그런 환상이 왜 생겨났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들은 1989년 이후 30년을 ‘자유민주주의 모방 시대’라고 부른다. 1989년 이후 구공산권 국가에서는 서방을 모방하려는 노력이 각종 이름 잔치로 나타났다. 미국화, 유럽화, 민주화, 자유화, 확장, 통합, 화합 세계화 등 그들이 벗어나고 싶어 했던 공산주의에서 탈피하는 지름길은 서방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방은 곧 자기 부정이다. 다른 대상을 모방할수록 고유한 전통을 버려야만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후 자유민주주의 활짝
공산권 ‘잘나가는’ 서방 따라하기 총력
강요된 모방에 동유럽 곳곳 반발심 커져
특히 유럽연합 가입 조건이라면서 서유럽이 자신들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모습에 동유럽 국가들은 과거 식민 시절과 공산주의를 강압하던 옛 소련의 기억을 떠올렸다. 젊은이들이 서방으로 줄줄이 떠나자 남은 자들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이 과정에서 동유럽 지역민들의 심리적 스트레스는 점차 커졌고,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서 반자유주의·포퓰리즘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등지에서는 젊은이들의 이민과 중동·아프리카 난민 문제를 교묘히 엮어 불안감을 자극한 대중 선동 정치인이 정권을 잡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도 자유민주주의는 우스꽝스럽게 변주됐다. 냉전 시절 미국과 대등한 관계였다가 경제 지원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러시아 국민들의 자존심은 구겨졌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정치 시스템을 모방하는 대신 미국이 다른 나라 정치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미국에 굴욕을 안겨 자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민주주의 모방 시대의 정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수많은 나라들의 동경과 흠모 대상이 되어 왔던 미국이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을 두고 책은 모방의 전염성이 역으로 작용한 사례라고 분석한다.
러시아선 통치수단으로 민주주의 변주
수용안한 中 부상에 ‘모방시대’ 마침표
모방 넘어 새로운 대안 찾기 다시 시작
책은 이 같은 자유민주주의 모방시대가 중국의 부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고 말한다. 중국은 경제 성장을 위한 수단을 차용하거나 도용할 뿐 자유민주주의를 모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도미노로 붕괴할 때 텐안먼 광장 앞에 들이닥친 민주화 바람을 틀어막았다. 공산당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되 외부 세계의 기술만 도입했다. 자신들의 체제를 도입하라고 다른 국가에 강요하지도 않는다.
책은 지난 30년 동안 자유 민주주의가 모방과 변주, 반발이라는 칼에 여러 차례 찔려 현재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책은 이데올로기 대결의 시대와 살아남은 이데올로기 모방의 시대를 넘어 이제 다시 여러 정치적 대안들이 모색되는 다원적이고 경쟁적인 세계로 복귀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의식 있는 지도자가 등장하고 지지하는 시민의 힘이 합쳐진다면 순화된 자유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책은 매년 국제이슈 관련 우수 논픽션을 시상하는 라이오넬 겔버상 올해 수상작이다. 주로 베를린을 중심으로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지만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은 이미 1989년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대립을 끝낸 후 30년 간 자유주의 모방 시대라는 혼돈의 시기까지 거쳐 현재 새로운 정치적 대안 찾기에 나섰지만 한국은 여전히 1989년 이전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