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28일 새벽 서울지방법원 당직 판사실. 현직 법관에 대한 구속 영장이 날아들었다. 피의자는 항소 3부 재판장인 이범렬 부장판사와 배석 최공웅 판사, 참여서기 이남영 등 3명. 검찰은 이들이 출장길에 피고인 변호사 측에게 향응을 제공 받았다는 혐의를 걸었다. 출장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던 당시에는 관행이었으나 검찰은 문제로 삼았다. 법원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돌려보냈으나 판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격론 끝에 가장 온건한 방안을 대응책으로 골랐다. 집단 사표 제출. 서울지원 판사 42명 중 37명이 사표를 냈다.
판사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이 사법부를 시녀로 삼으려 한다는 판단 때문. 자유당 정권에서 현직 법원장이 뇌물죄로 구속됐을 때도 판사들은 동요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마침 권력이 사법부를 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시절이었다. 1971년 4월 대선에서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어렵게 이긴 박정희 대통령의 세 번째 임기 시작(7월)을 전후해 주목을 끄는 판결도 잇따랐다. 대법원은 처음으로 위헌심판권을 행사하며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박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문인들의 시국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이 많았다.
결국 검찰이 칼을 들었지만 법관들은 길들이기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검찰은 비겁하게 맞섰다. 영장이 기각되자 보완했다는 증거가 성 접대. 검찰은 영장을 기자들에게 읽어줬다. 형법(제126조)에 명시된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스스로 여겨가며 법원에 망신을 주려고 애썼다. 판사들은 더 저항했다. 전국 법관 415명 가운데 153명이 사표를 냈다. 전국 법관회의에서는 그동안 정권의 횡포가 줄줄이 공개됐다. 공안사건에 협조하지 않으면 용공으로 몰아 정보기관이 예금통장을 조사, 법원뿐 아니라 가족까지 미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관들의 저항은 한 달 뒤 박 대통령이 수사 중단을 지시하면서 봉합됐으나 잔인한 끝이 남았다.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권은 재임용제도를 만들어 강직한 판사들을 내쫓았다. 반대로 판사들과 대척점에 섰던 검사들은 출세 가도를 달렸다. 1차 사법파동 49주년. 1인당 국민소득 212달러, 수출 10억 달러에 머물던 당시에 비해 경제는 크게 성장했으나 법조계도 그럴까. 권력에 아첨하던 검찰은 정치는 물론 국민까지 압도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커졌다. 법원을 영달의 도구로 악용하고도 반성조차 없는 법관도 많다. 거꾸로 가는 세상. 걱정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