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습’은 가능할까. 글로벌 IT 생태계를 수십년째 주도하던 인텔이 모바일 칩에서는 퀄컴 등에 주도권을 내준데 이어 초미세공정에서도 고전하며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여기에 지난 15여년간 노트북 부문의 핵심 파트너였던 애플이 영국 ARM 설계도 기반의 중앙처리장치(CPU) 자체 개발에 나서며 인텔의 양대 핵심사업 분야인 ‘노트북용 CPU’ 시장까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인텔이 CPU 설계에 집중하는 대신, 반도체 생산은 삼성전자(005930)나 TSMC와 같은 외부 파운드리에 맡기지 않을 경우 AMD와 같은 경쟁사 대비 계속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밥스완 인텔 최고경영자(CEO) 또한 올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제품을 내부적으로 생산하거나 외부에 맡기는 방식 등을 다양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히며 외부 파운드리 이용 가능성을 열어두는 모습이다.
인텔은 무엇보다 자율주행 기술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제국의 역습’을 준비중이다. 인텔은 지난 2017년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및 자율주행 부문에서 업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이스라엘의 모빌아이를 인수하며 미래 성장의 주춧돌을 세운 바 있다. 결국 인텔 제국의 역습은 외부 파운드리 활용과 자율주행 부문의 빠른 기술 업그레이드 및 관련 시장 보급 확대시 구현 가능할 전망이다.
'틱톡전략' 수정 후.. 고전하는 인텔제국 |
2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지난 2016년 이른바 ‘틱톡전략’을 폐기한 후 반도체 선두업체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한 틱톡 전략은 반도체 미세화에 역점을 둔 틱(Tick) 전략과 반도체 설계도인 아키텍쳐 부문 개선에 힘을 준 톡(Tock) 전략을 혼합해 운영된다. 인텔은 틱톡 전략을 기반으로 제품 미세화와 아키텍쳐 변경을 주기적으로 단행하며 IT 생태계를 이끌어 왔다. 글로벌 서버 사업자나 노트북 업체들은 인텔의 신형 CPU 출시 주기에 맞춰 제품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신형 제품을 내놓았으며,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한 여타 업체들의 수익 또한 비슷한 주기로 늘어나는 생태계가 10년 넘게 지속돼 왔다.
반면 인텔은 지난 2016년부터 수익성 및 공정 최적화에 집중한 이른바 ‘파오(Process-Architecture-Optimization)’ 전략을 추구하며 전략을 선회했다. 당시 반도체 미세 공정이 불화아르곤(ArF) 기반의 노광장비로는 더이상 미세화가 불과한 10나노(10억분의 1m) 이하로까지 정밀화되면서 추가적인 공정 미세화는 비용 상승으로 귀결돼, 결국 수익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 7나노 이하 반도체 생산에서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공급하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확보가 필수라는 점에서 초미세 공정 확대시 비용이 급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EUV 노광장비는 1대당 가격이 1,500~2,000억원 가량으로 외부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물량 수주 없이 자체 제품만을 생산하는 인텔로서는 도입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파운드리 통한 5나노 제품의 등장.. 인텔의 판단미스 |
문제는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등 경쟁이 인텔의 ‘파오 전략’을 결국 실패한 전략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연간 파운드리 부문에만 수십조원을 쏟아부으며 ‘양자간섭’ 우려가 나올 정도로 초미세화 된 반도체를 쏟아내고 있다. 이 덕분에 인텔의 유일한 경쟁자이지만 존재감은 미약했던 AMD가 7나노 공정 기반의 CPU를 시장에 내놓는 등 미세 공정에서 인텔 대비 앞설 수 있게 됐다. 반면 인텔은 현재 10나노 기반 제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텔의 10나노 공정 제품 회선폭이 경쟁 업체의 8나노 수준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TSMC 등과 비교해 인텔 미세 공정이 몇세대 뒤쳐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 TSMC는 올 하반기 퀄컴이나 애플 칩을 5나노 기반으로 양산할 계획이며 2022년에는 3나노 기반 제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반면 인텔은 오는 2022년 말에나 7나노 제품 양산이 가능할 전망이며 이마저도 일정이 뒤로 밀릴 것이란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이 덕분에 PC 시장에서는 AMD 설계 기반 CPU의 점유율이 인텔 CPU 점유율을 넘어설 기세이며 노트북 시장에서는 AMD CPU가 점유율 17%를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인텔이 외부 파운드리에 칩 생산을 맡기지 않고 자체 생산을 고집할 경우 결국 서버를 제외한 노트북과 PC용 CPU 시장에서는 1위 자리를 빼앗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인텔은 안정성이 높고 가격이 비싼 서버용 CPU 시장에서는 95%이상의 점유율로 압도적 위상을 자랑하지만 노트북과 PC 시장에서는 ‘가성비’가 뛰어난 AMD에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버용 CPU 시장 또한 리사수 CEO가 이끄는 AMD에 조금씩 영토를 내주고 있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TSMC가 제작한 인텔 CPU? 가능성 높다 |
반면 인텔이 CPU 생산을 외부 위탁할 경우 이 문제는 단번에 해결된다. 삼성전자와 TSMC는 EUV 장비 대거 도입으로 올해 5나노 기반 반도체 양산에 나설 계획이다. 인텔로서는 몇세대 앞선 초미세공정 기반 반도체를 비교적 단시일내에 내놓을 수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인텔이 CPU 생산을 외부에 맡길 경우 발생할 문제점이다. 우선 지금까지 구매하고 또 업그레이드 한 반도체 생산 장비를 비롯해 웬만한 파운드리 업체 규모의 인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단순 매몰비용으로 간주하기엔 생산 노하우 등 무형 자산의 가치도 상당하다. 인텔이 ‘레거시’에 발목 잡혀 초미세공정 분야에서 속도를 못낸다는 비판 속에서도, 반도체 자체 생산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텔 내부에서는 외부 파운드리 이용시 CPU 관련 아키텍쳐 노하우가 외부에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 때문에 AMD가 파운드리 사업부를 떼 내어 ‘글로벌 파운드리’를 설립한 것처럼 인텔도 파운드리 부문을 분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텔의 CPU 자체 생산은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분석이 나오는만큼 그래픽처리장치(GPU)나 일부 칩 생산을 외부에 우선 맡기고 제일 마지막에 CPU 위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인텔의 반도체 위탁생산시 파트너사로는 TSMC가 첫손에 꼽힌다. 대만 현지 언론은 지난 27일 TSMC가 인텔의 6나노 기반 칩 물량을 수주했다고 보도하는 등 이미 반도체 생산위탁을 맡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해당 보도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TMSC는 인텔과 AMD 제품 모두를 양산하는 파운드리가 된다.
삼성전자 또한 파트너사로 유력하다. 삼성전자는 미국 오스틴에서 14나노 공정 기반의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중이며 7나노 이하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삼성전자가 D램·낸드플래시 업계 세계 1위 사업자로 인텔 생태계의 핵심축 중 하나라는 점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 준다. 실제 인텔 GPU 사업을 총괄하는 라자 코두리 인텔 수석 부사장이 지난해 4월 경기도 기흥에 자리한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장을 방문해 양사간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양사간 접촉은 알음알음 늘고 있다. 물론 삼성전자가 자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를 꾸준히 내놓으며 반도체 설계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 점은, 반도체 기술 유출 가능성에 지나치게 민감한 인텔 측을 자극할 수 있어 변수가 될 전망이다.
자율주행 반도체로.. '왕의 귀환' 만들어낼까 |
일부에서는 인텔이 아직 절대강자가 없는 자율주행 부문 경쟁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역습’에 이어 ‘왕의 귀환’을 이뤄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역습의 선봉장에는 지난 2017년 153억달러에 인수한 모빌아이가 선봉에 설 전망이다. 모빌아이는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FSD)’ 칩의 초기버전인 ‘HW1’에 설계 기술을 제공하며 자율주행 기술력을 입증한 바 있다. 인텔은 또 지난 5월 ‘서비스형 모빌리티(MaaS)’ 솔루션 업체인 이스라엘의 무빗을 9억달러에 인수했다.
밥 스완 인텔 CEO는 2분기 실적발표 컨콜에서 “자율주행 서비스 시장 규모가 2030년에는 2,30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며 “인텔은 모빌아이의 ADAS 기술과 무빗의 기술을 더해 운송부문의 혁명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