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경제大國 진입 동반자로…영욕의 세월 펜촉에 담아 [서울경제 창간60주년]

■서울경제 기사로 본 경제발전 60년

1960년대 '수출공업화 정책' 시동

70년대 10% 넘는 '고도성장' 이뤄

80년대 3저 업고 수출증가율 30%

1997년 IMF구제금융 전세계 특종

2000년대 글로벌 금융위기 풍파도

올 국가부채 급증에 '위험성 경고'

전쟁의 상흔이 남아 최빈국 상태였던 지난 1960년.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억8,700만달러(2,498억원)에 불과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한국경제는 고속성장의 용틀임을 시작했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면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대한민국은 1970년대 석유파동과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겪으면서도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인 30-50클럽에 일곱 번째로 가입했다. 2019년 GDP는 1조6,463억달러(1,919조399억원)로 60년 만에 828배 커졌다. 서울경제신문은 시대를 앞서가는 특종과 기획으로 선진 경제대국 진입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1960년 9월28일자 1면 ‘국영기업 불하 결정’1960년 9월28일자 1면 ‘국영기업 불하 결정’



한국경제 태동기


1960년대는 성장의 토대를 닦는 시기였다. 군사정부는 수출 공업화 정책을 시작하며 개발연대의 서막을 열었다. 창간 직후인 1960년 8월2일자에 서울경제는 ‘드러난 한미 경제 밀약 내용-예산 등 공동 검토·공정환율도 실세로 인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1면 톱으로 게재했다. 이때부터 한미 경제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집요하게 협정의 불공정·불평등을 물고 늘어졌다. 기사와 함께 한 면을 할애해 이 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만평도 실었다. 결국 이 협정은 초기의 불평등 조항이 빠진 채 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맺어졌다. 1960년 9월28일자에는 ‘국영기업체 불하 결정’ ‘재력 있는 원매자를 물색-일차로 조선공사’라는 특종 기사가 지면을 장식했다. 재무부 장관이 재일교포 재벌과 수의계약 교섭을 진행 중이라는 부제목이 딸린 이 기사는 주요 기업들로 하여금 국영기업체 인수전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게 만드는 등 경제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1966년 9월에는 일본이 한일 어업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공동규제수역에서 잡은 고기의 양을 부풀리려 한 의혹을 고발했다. 엄청난 반향 속에 수산청은 어획량 보고를 재검토하고 한일 어업협정을 우리 측에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1967년 1월11일자 1면에는 ‘개발금융회사 3월 발족’이라는 제하의 톱 기사가 나갔다. 국제금융공사 조사단의 방한 소식과 더불어 소개된 이 특종은 보름간 후속기사가 이어지며 한국의 ‘제2금융권’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1972년 8월2일자 3면 ‘도표로 본 경제성장’1972년 8월2일자 3면 ‘도표로 본 경제성장’


고도성장기

한국경제는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철도 등의 교통망이 본격 구축됐다. 다만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탓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1972~1973년, 1979~1980년)을 겪으면서 급격한 물가상승과 경상수지 적자라는 후유증도 앓았다. 1973년 2월 ‘종합무역상사 설립 추진’이라는 단독 기사는 재벌그룹들의 치열한 선정 경쟁으로 이어졌다. 서울경제신문은 추진 일정부터 지정까지 상세 보도했고 종합무역상사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계열기업군을 이끄는 선단경영의 핵심이자 수출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77년 7월 도입된 부가가치세의 당초 예정된 세율은 13%였다.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한 박정희 대통령은 부가세 도입은 강행하되 상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세율은 10%로 낮추기로 했고 서울경제신문은 이를 특종 보도했다.

1990년 10월22일자 1면 ‘대소경협 30억弗 지원’1990년 10월22일자 1면 ‘대소경협 30억弗 지원’




1997년 11월21일자 1면 ‘IMF 차입’ 특종1997년 11월21일자 1면 ‘IMF 차입’ 특종


2000년 8월1일자 1면 창간40주년 특대호2000년 8월1일자 1면 창간40주년 특대호


암흑기에서 재도약기


1980년대 우리 경제의 버팀목은 수출이었다. 저금리·저환율·저유가의 3저(低) 현상을 등에 업고 수출증가율은 30%가 넘었다. 그러나 호황기에 유입된 유동성에 따른 부동산 거품도 발생했다. 1989년 부동산 투기가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정부가 종합토지세 도입을 검토하고 있으며 부과 대상은 전국의 모든 토지로 삼는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파장은 커졌고 1990년 시행될 때는 내용이 축소됐다. 1990년 10월 정부가 소련과 수교한 뒤 후속조치로 3년 동안 30억달러의 경협차관을 제공한다는 ‘대소경협 30억달러 지원’ 기사는 정국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국회에서는 ‘구걸외교론’까지 제기됐다.

관련기사



한국은 대기업들의 연쇄 파산과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는 치욕을 겪었다. 외환위기 직전 당국은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IMF에 가는 일은 절대 없다’고 허장성세를 부렸다. 서울경제신문은 1997년 11월21일자 가판에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의 극비 방한을, 본판에서는 600억달러 구제금융협의를 가장 발 빠르게 보도하며 혹독한 시련을 예고했다. 비밀리에 방한한 IMF 수석부총재가 국내 인사와 호텔에서 비밀협상을 벌였다는 특종은 관련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1990년대 말 전 세계적 정보기술(IT)붐에 이은 벤처붐은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다. 서울경제신문은 2000년 10월 코스닥기업 L사가 1조5,000억원의 자금을 3시간짜리 초단기로 빌리며 외자유치로 위장한 것을 추적, 보도하면서 무분별한 외자유치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2019년 1월2일자 1면 신년기획2019년 1월2일자 1면 신년기획


21세기 정상으로

2003년 카드사태에 이어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숨 쉴 틈 없이 위기가 몰아닥쳤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침체에 빠져들었다. 2009년 내수 진작을 위한 노후차 세제지원 특종도 서울경제의 몫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경악했던 2014년, 4월18일자 ‘세월호 선사 청해진해운, 세모가 전신’이라는 기사를 통해 청해진해운의 실질적 대주주가 각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유병언 전 회장의 아들들이라는 실체를 밝혀냈다.

최근에는 경제지의 특성을 살려 금융투자비리 의혹을 심층 취재했다. 2016년에는 ‘청담동 주식부자’ L씨 ‘수상한 투자’ 베일 벗나 기사를 통해 청담동 주식부자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이희진의 실체를 파헤쳤다. 2019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사모펀드 비리를 추적했고 75억원이 투자된 사모펀드의 서류상 대표 외에 실제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과 실제 주인이 바로 조 전 장관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연이어 보도했다. 또 지난해 5월에는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의 홍남기 “국가부채 마지노선 40%로 재정 운용” 文 “근거가 뭐냐, 미국은 107%라는데” 단독 기사를 보도해 국가채무비율 40%와 재정건전성 이슈를 제기했다. 올해 성장률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전통 제조업의 바통을 이어받을 성장 모멘텀이 절실한 상황이다.

황정원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