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네스토리우스 추방

435년, 고전 역수입 토대 이뤄




435년 8월 3일 로마(비잔틴) 제국 황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기독교 공인 초기여서 황제의 속권이 교권을 압도하던 시절,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그는 항변도 못하고 아라비아의 페트라(요르단 지역에 있던 로마의 도시)로 쫓겨났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무렵인 40대 후반에 추방된 네스토리우스는 451년 아프리카 어디선가 생을 마쳤다. 고위성직자로서 권세를 누린 기간이 짧았어도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통일신라와 발해에서도 유물이 발견된다는 아시아 기독교(景敎)의 바탕이 바로 네스토리우스교다.


먼저 그의 실각을 따라가 보자. 당시 로마제국의 3대 교구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 3개.(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은 나중에 대교구로 승격했다) 발언권이 가장 강한 교구는 로마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였다. 왕성한 상업 활동과 사람들의 활발한 왕래 덕분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성장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던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427년 발칵 뒤집혔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안디옥 교구 출신인 네스토리우스가 임명됐기 때문이다. 두 교구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신격과 성모 마리아의 존칭 문제가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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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파는 신은 단일한 위격(位格)을 가진 게 아니라 인간의 위격과 신의 위격을 동시에 지녔다고 봤다. 그리스도는 ‘신이자 인간’이라고 여겼던 알렉산드리아파가 즉각 공격에 나섰다. 성모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나 ‘인간의 어머니’이기보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강조한 대목도 알렉산드리아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줬다. 431년 논쟁을 위해 모인 에페수스 공의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파의 손을 들어줬다. 반대나 중간 성향을 가진 성직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공의회를 개최해 원하는 결론은 얻은 알렉산드리아파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이단’이라는 멍에를 씌웠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시리아, 페르시아를 거쳐 당나라에도 선교의 손을 뻗었다. 이슬람 등장 이후 교세는 위축돼 세계적으로 25만여 명의 신도가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와 근대의 여명에서 중동과 아시아에 걸친 네스토리우스교는 동서양 문물 교류에 윤활유 역할을 다해냈다. 교세가 약해졌어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빈번하게 언급될 정도로 중앙아시아의 중계무역을 거들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지식의 역수입 창고였다는 사실. 고대 그리스의 고전이 네스토리우스파에 의해 아랍어로 번역돼 대부분 살아남았다. 문예부흥기(르네상스)에 대거 유입된 네스토리우스파의 번역물이 없었다면 유럽의 암흑기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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