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돈은 명분이 있으면 쓰지만 조그만 돈은 아껴. 휴지 한 장도 반절로 접어서 써.”
이수영 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은 서울경제신문 창간 60주년 특별 인터뷰에서 “돈은 필요할 때 쓰는 것이다. 나라와 사회를 위해 쓸 때 보람 있다. 나만 잘살면 안 된다”며 돈에 관한 철학도 밝혔다.
초등학교 때 ‘자라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면 자선사업가라고 했다는 그의 가치관은 베풀기와 책을 좋아하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땅과 집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아버지로부터는 부동산 투자에 대한 감을 배웠다. “엄마는 6·25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쌀을 인민군한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문지방 높이까지 채워놓고 돗자리를 깔아 6개월 치를 보관했어. 초등학교도 못 나온 분인데 ‘아가야’라고 부르며 많은 것을 가르쳤지. 부모가 착하면 자식이 효자가 돼. 사람을 부릴 때는 마음을 헤아려줘야 하고.” 그의 부모는 서울 종로 필운동 집 근처 사직공원에서 호박이나 감자 등을 심어 배고픈 동네 사람에게 많이 보시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성질이 급한데다 뼈대 있는 양반의 후예라고 시시콜콜 따지고 노름하고 빚보증을 섰다가 쫄딱 망했어. 설움을 당한 뒤 장사를 해 돈을 모아 서울로 이사했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10선거에서 필운동선거관리위원장도 해 대통령상도 받아 6·25 때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엄마의 음덕으로 화를 피한 거야. 엄마가 덕을 베풀면 자식도 잘되고 집안이 잘되는 법이지.”
그는 “기자 때는 몸을 딱 세웠는데 사업하며 고개 숙일 줄 알게 됐다. 거울 보고 고개 숙이고 웃는 연습을 했다”며 “운이 좋았는데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여러 가지로 챙겨줬다. 그럴 때 좋은 학교를 다닌 게 자랑스러웠다. 사람은 인상이 좋고 겸손하고 밥도 살 줄 알아야 한다”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인터뷰가 끝난 뒤 1인당 5만5,000원짜리 저녁을 산 그는 이제는 건강이 좋지 않아 미국에 갈 때 마일리지 업그레이드를 통해 1등석을 타고 간다고 했다.
그는 “서울경제 기자 시절인 1971년 서울대 법대 동창회 장학재단 재정부장을 맡자마자 현대경제일보 퇴직금 4만원을 장학금으로 냈고 이후 20만원을 추가 기탁했다”며 “권번(일제강점기 시절 기생학교) 출신으로 여관을 하던 이차숙 할머니가 500만원을 가져왔는데 지금은 5억원도 넘는 큰돈이다. 돈은 그렇게 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