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빈센트 반고흐와 그림 거래상이었던 동생 테오의 관계는 형제 이상의 동반자적 끈끈함이 있었다.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딜러 다니엘 칸바일러를 만나 ‘날개’를 달았고, 폴 세잔이 풀죽지 않게 늘 다독여준 이는 파리의 화상(畵商) 앙브루아즈 볼라르였다. 레오 카스텔리가 없었으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 클라스 올덴버그 등의 팝아트도 어떻게 평가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백남준이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기까지의 숨은 공신은 뉴욕의 갤러리스트 할리 솔로몬이었다.
“이영희 대표님과의 관계를 ‘예술적 동지’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예술은 인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행위,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예술이 만들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갤러리의 역할이 중요하죠. 갤러리는 작가와 감상자를 연결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가와 갤러리는 ‘동지적’ 혹은 ‘사회적’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신간 ‘화가 서용선과의 대화’(좋은땅 펴냄)에서 작가 서용선은 갤러리스트 이영희와의 인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애호가이자 컬렉터로 살다 지난 2006~2014년 종로구 삼청동과 팔판동에서 리씨갤러리를 운영하며 늦깎이 갤러리스트가 된 이영희 씨는 2008년 서용선 작가를 처음 만나 수차례 작업실을 드나들며 구작부터 최근작, 유화부터 드로잉까지 샅샅이 살핀 뒤 풍경화를 제안하며 인연을 시작했다. 작업에 전념하고 싶어 서울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직후였던 서용선은 “역사와 도시를 주제로 인물을 주로 그려온” 자신이 풍경을 그리는 것에 대해 망설였다. 1978년 국전(國展)에서 소나무 그림으로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소나무’가 2점이나 소장돼 있지만 이후 약 30년간 풍경을 그리지 않은 터였다.
“안 그리는 풍경으로 전시하고 싶다 하니 고민되더군요. 비엔날레나 미술관에서 풍경화 전시를 잘 않을 정도로, 현대미술에서 풍경은 잊힌 장르가 되고 있었거든요. 풍경화를 그리는 게 상업성과 타협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풍경이라는 잠시 유보된 장르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동안 시간 없다는 핑계로 손 못 대던 것을 시도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르렀습니다.”
서용선은 2009년 리씨갤러리에서 개인전 ‘산(山)·수(水)’를 열었다. 일본식 조어인 ‘풍경’ 대신 우리 본래의 경관 그림을 칭하는 ‘산수’를 제목에 내세웠고 이후 4년간 매년 같은 주제의 전시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이영희는 서용선이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로 선정되고 2014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 대표작가로 뿌리내리고 해외전시와 레지던시를 오가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지원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남다른 인연의 두 사람이 서용선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반이 될 작가의 삶과 철학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 대담집이다. 지난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각각 뉴욕의 작업실과 서울의 집에 고립된 두 사람이 전화로 안부를 묻던 중 책이 시작됐다.
이영희는 “서용선의 작품은 안다 해도 그의 삶과 생각을 잘 알기는 쉽지 않기에 갤러리스트로서 더 많은 분들께 소개하고 싶었을 뿐, 작가예찬론은 결코 아니다”면서 “서용선 작가가 그림을 잘 그리는 분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다른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분명하고, 지금까지 매일 봐도 그의 그림은 싫증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용선은 “작가가 작품을 표현할 때조차도 완전한 확신을 갖기 어렵고 자신의 신념과 작품이 일치하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남의 작품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만은 않은 일”이라며 “10년 넘게 자신이 소개해 온 작품에 대한 확신을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가의 생활과 인생에 대한 질문과 함께 책에 담긴 것 아닐까 한다”고 밝혔다. 책에는 서용선이 도시와 인간을 다루는 까닭, 역사와 신화의 맥락 속에서 화난 듯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 등이 담겨 있다. “그림이 윤리적 문제를 다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다뤘기에 불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낀다”거나 “실체가 존재하는지를 알려고 하는 일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서용선의 대답은 굵은 선과 강렬한 색을 사용하는 그가 왜 거칠게 붓질하고 갈구하는 듯한 여백을 두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