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들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웃이 원수가 아니고 원수가 모두 이웃은 아닐 테지만, 문득 두 문장의 주어가 동일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의 공간이 배치된다. 그 중세인의 상상력에 따르면 지옥은 땅밑에 있으며,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일수록 더 아래 밑바닥에 배정된다.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면 처음 림보가 등장한다. 이곳에는 소크라테스나 호메로스처럼 훌륭한 능력과 인격의 소유자이지만 기독교 신자일 수 없었던 예수 이전의 사람들 혹은 세례를 못 받고 죽은 아기들이 배치된 장소다. 이곳은 (구원의 희망이 없는) 지옥에 속하기는 하지만, 유일하게 벌이 없다. 그 아래부터 무시무시한 벌이 있는 지옥의 살풍경이 펼쳐진다. 그럼 단테에게 가장 가벼운 죄와 가장 무거운 죄는 어떤 것이었을까.
가장 가벼운 죄는 음욕이다. 의외다. 현대인들은 (중세의 세계관이던) 기독교가 과도하게 성욕을 억압했다는 프로이트나 니체식의 견해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무·찬양되는 물욕은 중세인에게 음욕보다 훨씬 심각한 범죄였다. 어쩌면 이런 중세적 가치관은 종족 보존의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겠다. 성적 욕망이란 육체를 가진 인간 존재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것으로 그것이 아무리 추잡한 행태를 보인다 해도, 엄혹한 환경 속에서 끈질기게 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반면 물욕이나 인색함은 공동체의 유대를 크게 해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 여겨졌던 것 같다. 인간이 지상 최고의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규모의 집단 형성이 가능했던 공동체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단테는 가장 무거운 죄를 배신이라고 지목한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배반,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신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배신자들은 거의 하나같이 가까운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예를 들어 유다는 예수의 가까운 제자였다. 오직 가까운 친구만이 배신할 수 있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는 신뢰관계가 거의 없기에, 배신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이웃만이 철천지원수가 될 수 있다.
이웃이란 ‘거리’가 없는 가까운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허물’없는 사이라고 한다. 여기서 허물이란 살의 껍질을 뜻한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방어벽을 허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신뢰에 의지해 볼품없는 알몸을, 즉 (허물의 두 번째 뜻인) 잘못·흠·과오 등을 상대에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이 이웃이다. 이런 이웃관계는 신뢰에 금이 가면 살을 에는 고통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가식 없던 천국이 무방비의 지옥으로 돌변하기에 그렇다.
‘이웃-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일단 사람을 가리지 말고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로 들린다. 동시에 원수 같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도 들린다. ‘거리와 허물’이란 실은 미지근한 사랑만을 허용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다. 그 장치가 사라진 상태에서 믿음이 깨질 때, 이웃은 더는 사랑하기 불가능한 ‘웬수’가 된다. 최소한의 방어장치마저 제거할 정도로 이웃을 믿었건만, 그가 내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이웃이 배신하면서 원수가 된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믿음은 일정 부분 내가 쌓아올린 환상일 수 있다. 그가 아니라 그에 대한 ‘나의 환상’을 믿은 것이다. 이런 배신의 경우 이웃이 아니라 내 탓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웃이 내가 만든 환상을 배반했다고 이웃만 탓할 수는 없다. 김수영의 시 가운데 ‘아픈 몸이’라는 작품이 있다. 거기에 보면, 식구와 친구와 적이 동행의 파트너로 등장한다.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적들과 함께/적들의 적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
마음의 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왜 아픈 걸까. 이웃이 친구와 적으로 갈라지고, 종국에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으려면, 이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원수이며, ‘적들의 적들’인 친구는 오직 적을 통해서만 규정될 만큼 적과 가깝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깨달음도 어렵지만, 막연한 인식만으로 몸의 아픔을 막을 수는 없다. 아픈 감각인 만큼 마음의 병도 ‘몸’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몸으로 ‘무한히’ 사랑을 연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죽기 전까지 우리들의 아픔은 계속될 예정이다. 원수를 친구로 되돌려놓는 이 연습의 최대 목표치는 무통(無痛) 상태가 아니라 ‘아픔을 감내할 수 있는 정도’로 잡아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