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9년 베수비어스 화산 폭발

'폼페이 최후의 날'

헌팅턴도서관이 소장 중인 영국화가 조지프 라이트의 1776년작 베수비어스 화산 폭발. /위키피디아헌팅턴도서관이 소장 중인 영국화가 조지프 라이트의 1776년작 베수비어스 화산 폭발. /위키피디아



서기 79년 8월24일 오후1시, 로마제국 이탈리아 본토 남부 베수비어스산. 이른 아침부터 거대한 삼각 구름이 드리웠던 산 정상이 오후1시께 터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구름이 33㎞ 상공까지 솟구쳤다. 뜨거운 마그마에 녹아 반액체로 변한 고온의 바위와 화산재 등 화산쇄설물(tephra)도 초당 150만톤씩 솟구쳤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10만배 강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 폭발과 함께 거대한 구름이 생겼다.

서쪽으로 9㎞ 떨어진 나폴리에서 이 구름을 본 로마군 지역 사령관은 ‘줄기 같은 기둥으로 아주 높이 올랐다가 가지가 갈라지듯 퍼져나오는 모양’이라고 적었다. 군인이자 사상 최초로 박물지를 쓴 학자였던 플리니우스(당시 56세)는 휘하 함대에 총출동 명령을 내렸다. 산 밑 도시 폼페이의 시민들을 구조하기 위해서다.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바닷물이 뜨거워지고 해안이 화산재와 산에서 굴러온 암석으로 막혀도 플리니우스는 ‘행운의 여신은 용감한 자의 편에서 선다’며 앞으로 나갔다.


로마 상류층의 휴양도시 폼페이 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일부는 도시를 탈출했으나 대부분 남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어둠 아래서 화산재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머리에 베개를 하나씩 이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시민 2만명 중 절반 이상이 탈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바다에서는 대형 파도가 닥쳤다. 여자들의 비명과 아이들의 울음, 사내들의 고함이 도시를 덮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서로 찾는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고 도시는 3m 높이의 화산재에 뒤덮였다. 플리니우스도 유독가스에 죽었다.

관련기사



자연재해는 숙명일까. 그리스·로마시대 사람들은 화산을 신들의 감정 표출로 여겼다. 17세기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화산은 지구가 흘리는 눈물의 샘’이라고 생각했다. 베수비어스산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용암을 내뿜었다. 퇴적물도 더욱 많아지고 위치도 잊어버렸지만 사람들은 기억에서 폼페이를 놓지 않았다. 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 플리니우스가 친구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가 고스란히 전해진 덕분이다.

화산 폭발과 함께 사라진 폼페이는 18세기에야 본격화한 발굴이 70%가량 진행된 상태다. 화산재에 갇혔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왔다. 서로 꼭 안은 연인과 미동도 없는 초병,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죽은 어머니…. 재해나 질병에도 인간이 존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사랑과 의무, 헌신의 가치는 세월과 재난을 넘는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