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문화 중심의 출판사 얼떨결에 차리게 됐지만…궁궐서 우리책 보면 뿌듯"

■ CEO&STORY-김효형 눌와 대표

김효형 눌와출판사 대표가 서울 마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그간 출간한 책을 소개하고 있다./이호재기자


지난 1998년 겨울이었다. 특별히 추운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춥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한해만 더 버티면 ‘뉴밀레니엄’이 온다고들 했지만 세기말의 불안이 몹시 컸다. 길게 늘어진 외환위기의 그림자 탓에 누구도 쉽게 희망을 노래하지 못했고 호기롭게 “도전!”을 외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푸르나로 훌쩍 떠났던 벗이 귀국했다. 반가움에 둘이 만나 술을 진탕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지나가던 선배가 대뜸 “둘이 같이 출판사를 차려보라”는 말을 툭 던졌던 것 같다. “그럴까? 그러자!” 즉석에서 의기투합한 둘은 날이 밝자마자 곧장 출판사 사무실을 구하러 나섰다. “며칠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약을 마친 사무실에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있더라고요. 그제야 땅을 치고 후회했죠. 친구는 그래도 출판사 경험이 있었지만 저는 제대로 알지도 못했거든요.”

대학 졸업반 때 유홍준 선생님 만나

문화유산답사회 총무로서 전국 탐방

출판사 세운 후 뜻밖의 귀인들 만나

원예서 ‘양화소록’ 다시 펴내며 호평



국내 대표 인문서 전문 출판사 ‘눌와’의 김효형(57·사진) 대표가 털어놓은 출판사의 탄생 비화다. 하지만 운명은 늘 이런 식으로 불쑥 들이닥치지 않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 한구석에 오랫동안 출판에 대한 꿈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근사한 책을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자 싶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보니 미술과 역사·문화유산이 곧바로 떠올랐다.

“제가 대학 졸업반 때 유홍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한국미술 강의가 흥미로웠죠. 더 알고 싶어 선생님께 관련된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하니 선생님 연구실인 겨레미술공부방에 드나들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게 인연이 돼 결국 유 선생님이 꾸린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총무를 맡아 전국 구석구석 우리 문화유산을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발자취는 후일 15권짜리 ‘답사여행의 길잡이(돌베개 펴냄)’로 집대성됐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는 인문서로는 국내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김 대표는 출판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으나 답사회 총무로서 기획과 자료조사, 자료집 제작·편집 등의 경험을 이때 차곡차곡 쌓아올린 셈이다.

출판사를 차린 후 구체적인 첫 출판물을 정하는 데는 집단지성의 힘이 발휘됐다. 역사·미술 분야에 식견이 높은 주변 지인들이 ‘양화소록’을 리뉴얼해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김 대표의 취향과도 통했다. ‘양화소록’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강희안(1417~1465)이 꾸밈없는 마음으로 꽃과 나무들을 보살피고 관찰한 기록을 담은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원예서라 할 수 있다. 선비가 직접 화초를 키우며 알게 된 화초의 특성과 재배법, 꽃과 나무의 품격 등을 서술한 동시에 그 과정에서 깨달은 자연의 이치도 기록했는데 선비의 정갈한 마음과 사유가 돋보인다. 책은 1999년 11월 정식으로 출간됐다. 세상의 반응은 꽤 좋았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서 모두 큼지막하게 서평을 실어줬어요. 그래서 출판사가 책을 내면 언론에서 다 그렇게 써주는 줄 알았죠. 대형서점에서도 책이 좋은 자리에 비치됐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운이 좋았던 거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전을 리뉴얼한 책이 그렇게 큰 반응을 얻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당시 ‘양화소록’이 언론과 서점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일단 한눈에 시선을 잡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첫 출판물에 들인 공도 컸거니와 미술교육과 출신인 김 대표는 미적인 부분에서도 욕심이 컸다. 달리 말하자면 디자인·컬러·편집·크기 등 여러 면에서 인쇄 비용이 많이 드는 책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손익을 꼼꼼히 따지는 ‘장사꾼’이라면 결코 만들지 않았을 책이었다. 결론적으로 책은 이윤을 많이 내지 못했다. 그래도 세상이 좋은 책이라고 인정해줬다. ‘양화소록’은 20세기의 마지막 달에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읽을 만한 책 10선’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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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형 눌와출판사 대표가 서울 마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그간 출간한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이호재기자


우여곡절 끝에 첫 자식인 ‘양화소록’이 세상의 빛을 봤지만 또 한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술김’에 같이 출판사를 차렸던 친구가 안나푸르나가 그립다며 산으로 다시 떠나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난데없이 1인 출판사가 돼버렸고 출판과의 고독한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고마운 사람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려운 순간일수록 어디선가 예상치 못한 귀인이 등장한다.

“20년 넘게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책을 냈는데 가장 좋아하는 책이 박상진 교수님의 ‘궁궐의 우리 나무’입니다. 1999년 3월 출판사 등록을 한 후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경북대로 내려갔습니다. ‘양화소록’이 아직 나오기 전이었으니 제대로 된 책 한 권 낸 적 없는 출판사 명함이었죠. 그런데도 출판 제안에 선뜻 응해주셨습니다.”

박 교수는 나무 전문가다. 당시 박 교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나무에 관한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었다. 그 글이 마음에 들어 박 교수를 찾아갔고 나무와 역사문화를 같이 이야기하는 책을 내보자고 제안했다. 박 교수는 “수목원 못지않게 궁궐에 다양한 나무가 있다. 같이 가보자”며 오히려 구체적으로 역제안을 했다. 역사문화에 대한 애정과 전문적 지식의 조합은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궁궐의 우리 나무’는 일반인들이 궁궐의 조경과 자연생태, 우리 나무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책 한 권이 숨겨져 있던 좋은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낸 좋은 사례다.

박상진 교수著 ‘궁궐의 우리 나무’ 같은

좋은책 만드는 ‘눌와 시즌2’ 만들 것

김 대표는 2014년 ‘궁궐의 우리 나무’를 전면 개정해 다시 내놓기도 했다. 책에는 우리나라 궁궐에서 숨 쉬고 자라는 나무를 모두 담았다. 새로 수록된 사진 400장은 모두 김 대표가 직접 찍은 것이다. 또 궁궐의 변화를 반영해 궁궐 지도를 새롭게 작성한 뒤 책에 넣었다. 이 같은 작업은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없다면 쉽게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궁궐에 가면 해설사들이 ‘궁궐의 우리 나무’ 책을 활용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해설사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저희 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아요. 책을 낸 보람을 얻는 순간입니다.”

김 대표는 이 책 외에도 궁궐과 나무에 관련된 책을 많이 냈다. ‘우리 나무 이름 사전(박상진 지음)’ ‘홍순민의 한양 읽기:궁궐(홍순민 지음)’ ‘역사의 숲 조선왕릉(국립문화재연구소 지음)’ ‘동궐의 우리 새(장석신 지음)’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최종덕 지음)’ 등이다. 우리 문화유산과 자연의 미에 관한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궁무진하다.

출판사와 인연이 깊은 또 다른 저자는 당연히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다. 학창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 대표의 삶에 참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 교수는 눌와를 통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시리즈, ‘김광국의 석농화원’ 등의 책을 냈다.

김 대표가 우리 문화유산과 미술·자연생태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보니 직원들도 책 한 권을 만들 때마다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사진 한 장, 그림 하나라도 더 챙겨 넣으려는 김 대표의 마음을 직원들은 충분히 잘 안다. 그런 김 대표와 직원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 궁궐과 그림, 도자기와 석등, 나무와 꽃이 눌와의 책을 통해 독자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김 대표는 이런 직원들에게 늘 고맙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이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후배 출판인들이 계속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 또한 크다.

“지난 20년간 제가 이끌어간 시간은 ‘눌와 시즌1’이었습니다. 이제 직원들이 ‘눌와 시즌2’를 만들어가야죠. 이들이 저보다 더 좋은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일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He is… △1963년 전남 강진 △1989년 인하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1989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총무 △1999년 눌와출판사 설립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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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부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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