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3년 내내 노조를 중심으로 추진했지만 실패한 금융권 ‘노조추천 이사제’가 거여(巨與)·친노동 바람을 타고 다시 추진되고 있다. KB금융 노조 측이 세 번째 도전에 나섰고 자산관리공사(캠코), 기업은행 사외이사 임기도 속속 돌아온다. 안 그래도 ‘철밥통’이라는 평가를 받는 금융권 노조가 노조추천 이사제까지 밀어붙이면서 논란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9일 KB금융 우리사주조합은 “금융지주 회장에게 부여된 제왕적 권력이 사회적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11월20일 지주 임시 주주총회 때 직원들이 선택한 인물이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합 측은 ‘사회적 책임경영(ESG경영)’ 전문가 2명을 10일 후보로 추천할 예정이다.
캠코도 나설 것으로 보인다. 캠코 노조는 지난달 한 인사를 사외이사로 추천했지만 낙마했다. 하지만 11월28일 안태환·정권영·임춘길 사외이사의 임기가 끝나면서 재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은행 역시 내년 2, 3월 각각 김정훈, 이승재 사외이사의 임기가 만료된다. 지난 1월 기업은행 노사는 노조추천이사제를 유관기관과 적극 협의해 추진하기로 합의한 바 있어 관련 논의가 연말께 개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동자를 이사회 일원으로 포함하는 ‘노동이사제’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고 금융권은 이의 전 단계 격인 노조가 추천한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노조추천이사제를 추진해왔다. 2017년과 2018년 KB금융, 2019년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이 시도했지만 모두 무산됐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우선 박홍배 금융노조 위원장이 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현직 금융노조 위원장이 여당 최고위원이 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특히 박 위원은 국민은행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그동안 KB의 노조추천 이사제를 추진한 핵심 인물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면면도 노조추천 이사제 도입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민주당 정책위의장인 한정애 의원은 한국노총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출신이고 금융권과 맞닿은 국회 정무위 위원장인 윤관석 민주당 의원도 인천 부평공단 등에서 노동운동에 매진한 경력이 있다.
입법 움직임도 있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는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노동이사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고 상임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갖게 하는 내용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 주요 인사 면면을 보면 친(親)노조를 넘어 아예 노조화된 것 같다”며 “노조추천 이사제뿐만 아니라 점심시간 셧다운제, 직무성과급제, 정년 65세 연장 등 금융권의 친노동 이슈를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 논란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찬성 측은 노조추천 이사제 등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할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우리나라 금융권 노동자의 처우, 고용안정성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노동자에 더 많은 혜택을 줄 노조추천이사제 도입을 일반 국민들이 납득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빅테크의 공습으로 금융권에 어떤 때보다 빠른 경영판단이 필요한데 노조의 입김이 세지면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가령 은행 지점 축소 등 변화된 환경에 따른 신속한 경영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노조추천 이사가 반대하는 등의 상황이 비일비재할 것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