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한쪽은 군자고 다른 한쪽은 소인이라면, 물과 불이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향기로운 풀과 냄새나는 풀이 한 뿌리에서 날 수 없는 것과 같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곡 이이는 선조 12년 올린 상소에서 이같이 말했다. 자신의 당을 군자로, 상대 당을 소인으로 간주하는 극단적인 대결의식을 지양하면서 서로 다른 정파·학파가 공론을 이끌어내야 건강한 나라 운영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이를 비롯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기질과 학문적 지향점이 다르고, 때론 격렬하게 충돌했을지언정 상대를 인정하며 정책으로 경쟁했다. 다양한 학파와 여기서 나온 정책은 경연이나 상소의 형태로 공론장에 표출됐고, 대립 속에서도 공존할 수 있었다. 툭 하면 상대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파행을 반복하는, ‘동물·식물국회’ 수식어를 달고 사는 오늘날의 정치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신간 ‘조선 지식인의 국가 경영법’은 조선의 대표 지식인 24명의 행보를 5개 장으로 구분해 이들이 어떻게 개인의 신념과 공적인 책임 사이에서 중용을 유지하며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1부에서는 조선 건국 초기 지식 국가의 설계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 정몽주, 정도전, 권근, 기화 등 네 명을 다룬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지만, 정도전은 급진 개혁파였던 반면 정몽주는 온건파로서 왕을 바꾸는 역성혁명에 반대했다. 결국 정몽주는 이성계의 세력이 조선을 세우는데 협조하지 않아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고,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됐다. 2부에서는 일상 윤리의 실천을 지식 정치인의 신조로 삼았던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이전인 부자의 삶을 다뤘고, 3부에서는 학문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가의 길을 걸었던 이황, 조식, 김인후, 성혼, 이이 등 다섯 명의 삶을 조명한다. 4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표상이었던 류성룡, 조헌, 김장생, 김상헌, 최명길을 5부에서는 예송 논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임금에게 소신껏 맞선 김집, 송준길, 송시열, 허목, 윤휴, 박세채의 삶과 정신을 살펴본다.
저자는 조선의 정치인에 대해 “당장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국가의 먼 장래를 살피는 데 실학의 효용성이 있다고 믿었다”고 평가한다. 작은 손해도 보지 않겠노라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인 ‘어느 시대의 정치판’, 그리고 이에 실망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1만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