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국산 제품을 사주실 건지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지난해 7월 일본이 반도체 소재 부문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하고 한 달 뒤. 재계 대표급 인사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 비공개 대책회의에서 정부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소재부품장비 역량을 키우기 위해 이제 막 발을 내디딘 국내 신생 업체들이 수요 기업과 거래를 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예상치 못한 일본의 공세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터라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돌아온 재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기자와 만나 “정부가 지원을 해주면 국내 소부장 업체 제품의 수준이 높아지기야 하겠지만 이를 공정에 넣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이제 막 임상 1상 시험을 통과한 백신을 사람한테 바로 주입하는 격”이라고 했다. ‘트랙 레코드’가 없는 국산 제품을 섣불리 투입하기보다는 공급 리스크를 떠안고서라도 일본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정부가 수십년 전부터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음에도 소부장 자립에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01년 부품소재특별법 발효 이후 네 차례나 소재·부품발전기본계획을 세워 총력 지원을 약속했지만 좀처럼 글로벌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1년 전 ‘이번에는 다르다’고 외쳤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소부장 자립을 위해 지난해 내놓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성능평가지원사업’ 실적을 보면 품질인증을 받은 업체는 105건(8월 기준)에 달했지만 수요 업체와 최종적으로 납품계약을 체결한 곳은 3곳(6월)에 그쳤다.
정부가 소부장 자립에 목을 매는 데는 강제징용 판결을 둘러싼 한일 간 신경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적 속내가 담겨 있다. 하지만 변화는 더디기만 하고 그사이 양국 간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상대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산업 현장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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