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규제는 한 번 생기면 어지간해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규제를 통해 이익을 얻고 있는 집단과 권한을 확대하려는 공무원들 때문에 규제개혁 시도는 좌초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도입된 제도가 규제일몰제(sunlaw)다. 명백한 존속사유가 없는 규제는 일정 기한 뒤에 자동 폐지되도록 한 제도이다. 지난 2010년 이후 유통산업의 균형발전을 위해 대규모 점포의 출점을 막고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의 영업을 제한하는 3~5년 단위의 규제일몰제가 도입됐다. 이들 규제는 대부분 연장돼 올해 11월까지만 유효한데 21대 국회에서 다시 연장하는 입법안이 발의됐다.
문제는 제대로 된 규제영향평가(RIA) 없이 연장할 경우 법 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헌법에 규정된 평등권(11조)이나 영업활동의 자유(119조)를 위반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지난주 일몰연장 법률안이 일사천리로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지만 사후 탈이 나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규제영향평가를 실시한 후 입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과연 유통규제가 당초 목적인 대·중소 유통업계 균형발전과 전통시장·소상공인 보호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분석한 뒤 만약 미흡하다면 연장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아무런 기준 없이 무조건 규제만 연장한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21대 국회에서 경쟁적으로 발의된 11건의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중에는 규제 연장 외에 유통산업에 대한 규제 강도를 더 높이는 내용도 다수 포함돼 있다. 대규모 점포 출점 규제를 대폭 강화하고 복합쇼핑몰도 영업규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법안이 대표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한 매출 절벽, 소비의 온라인 시프트 등으로 대형 유통기업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규모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규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복합쇼핑몰도 우리 경제 발전과 유통생태계에 일조하는 한 축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균형 있는 고려가 전제돼야 산업진흥과 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것이다.
꼭 필요한 규제라 할지라도 경직돼서는 안 된다. 10년 전 도입된 유통규제가 현재의 변화된 시장 여건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다. 최근 비대면 소비 확산, 빅데이터·인공지능(AI)·가상현실(VR) 등 기술발전은 유통산업의 위기이자 기회요인이다. 변곡점에 선 유통산업에 실효성이 입증되지 않은 규제를 추가로 연장하거나 새로운 규제를 덧씌우는 것은 위기만 심화시킬 뿐이다. 전통시장 보호를 위해서는 신선식품 배송을 공동화해 지원한다든지 주차장을 확장·정비해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정부의 규제혁신 여정에서 유통산업이 예외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 코로나19 시대에 규제혁신의 햇볕이 유통산업에도 스며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