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기업어음(CP)을 통해 장기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실적 부진으로 차입 여건이 악화되자 상대적으로 자금 조달이 쉬운 CP에 몰리는 것이다. 공모 회사채와 달리 신용등급 리스크에 노출되지 않고 최근 저금리가 이어지면서 이자 부담도 예전보다 낮아져 장기 CP 발행이 급증한 것으로 풀이된다.
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해 이후 시장에서 발행된 장기 CP는 약 3조6,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전체 1조7,600억원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규모다. 이 기간 발행사도 9곳에서 24곳으로 급증했다. 롯데글로벌로지스·코리아세븐·한라(014790) 등은 창사 후 처음으로 장기 CP를 찍어냈다.
일반적으로 CP와 전자단기채권(전단채)이 발행되는 단기금융시장은 만기가 1년 이하인 자금을 조달하는 곳이다. 대신 금융감독원 신고 의무와 수요예측 등의 절차가 면제된다. 신용도 평가도 20단계로 세분된 장기신용등급과 달리 12단계로 나뉘어 있다. 투자 기간이 짧은 상품인 만큼 회사채 대비 정보공개가 한정적인 셈이다.
이에 따라 올해 코로나19 여파로 실적에 직격탄을 맞은 기업들이 신용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단기금융시장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회사채를 발행할 때는 기관투자가 수요예측 등을 거쳐야 해 시장 평가가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장기 CP는 이런 평가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 또한 회사채 사전 청약에서 미매각이 발생할 경우 회사의 민평금리가 상승하면서 향후 자금 조달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우량등급 쏠림 현상이 심화한 회사채 시장과 달리 단기금융시장의 금리가 안정세로 돌아선 영향도 컸다. 지난 3월 한때 2.23%까지 치솟았던 CP금리(A1등급, 91일물 기준)는 이날 기준 1.11%까지 떨어졌다. 기업과 은행의 신용도 격차를 보여주는 CP와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차도 최근 25bp(1bp=0.01%포인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연말을 앞두고 회사채 수요가 낮아질 수 있어 미매각 우려 없이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