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경력 역학조사관인 저자
‘상하이 독감’으로 전세계 패닉
증시 폭락·마스크 품귀현상 등
수개월전 뉴스보듯 정확한 예측
책에선 “겨울 백신개발” 희망
“장담컨대 감염병 또 와” 경고도
우선, 너무 놀라지 말라. 이것은 3년 전에 ‘가정하고 작성한 시나리오’의 시작 부분일 뿐이다.
“처음에 상하이 지역 의사들은 환자들이 단순히 계절성 독감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제 4월 중순이니 중국에서는 독감이 수그러들 시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들은 응급실에서 돌보는 환자 수백 명에게 그때껏 본 적 없는 증상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틀 사이에 적어도 50명이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사망한 상태다.”
이내 의사들은 이 환자들이 중국에서 지난 7년 동안 1,000명 넘게 확진 받은 조류독감감염증과 비슷한 치명적 질병을 앓는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챈다. 과거에는 조류독감 환자들이 지역과 시기를 달리해 산발적으로 발생했지만, 이제는 상하이 전역을 덮쳤다는 게 다른 점이다. 그 사이 다른 지역에서 환자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중국 공중보건 당국이 상하이 지역에서 빠르게 늘어나는 보건 위기가 세계를 휩쓸 독감 등장의 첫 신호일 수 있다고 확인하기도 전에 세계 전역에서 환자들이 나타난” 것이며 “세계는 이 독감을 ‘상하이 독감’이라 부르고 중국은 ‘서구독감’이라 부른다”는 대목까지, 기시감이 든다. 인구가 많고 교역이 활발한 중국 대도시의 상징으로 시나리오 속에 등장한 상하이를 ‘우한’으로 바꾸고, 독감(H7N9) 바이러스를 ‘코로나바이러스’로 바꾼다면 지난 연말 발생해 현재도 진행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 “주변에 있는 환자가 숨만 쉬어도 옮을 수 있다”는 점이나 “국립 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소장이 9월이나 10월 안에 효과 있는 백신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언급”하는 장면을 비롯해 선박 내 집단 감염, 국경 폐쇄와 여행 제한, 마스크 품귀현상, 증시 폭락과 생필품 약탈 등의 상황은 수 개월 전 뉴스를 보는 것 같다.
이 시나리오가 담긴 책 ‘살인 미생물과의 전쟁’의 공동저자는 미국 미네소타대 감염병연구·정책센터장 마이클 오스터홈과 에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작가 마크 올셰이커. 특히 오스터홈은 40년 경력의 역학 조사관으로 감염병과 씨름해 온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다. 지난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의 원제는 ‘Deadliest Enemy: Our War Against Killer Germ’.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한 지난 3월, 당시 미국 언론들이 소환해 출판시장에서 출간 3년 만에 베스트셀러로 ‘역주행’했던 이 책이 국내 번역서로 나왔다.
책의 전반부는 전염병을 발견하고 그에 대처한 역사를 배경지식으로 펼쳐 보인다. 1980~90년대 ‘폐포자충 폐렴’이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지던 정체 모를 질병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로 명명되기까지의 과정 등 바이러스 질환의 과거사, 19세기 중반 런던에서 최악의 콜레라가 발병하자 역학조사로 감염원인 ‘수돗물’을 찾아내 막은 공중보건의 역사 등이 소개됐다. 인류를 위협하는 감염병과 세균을 비롯해 박쥐·벌레·폐·생식기 등의 전염 수단도 설명한다.
저자의 시나리오에서 4월에 인지된 독감 감염률은 서서히 줄어 8월께 미국 대통령이 “어려움을 견뎌냈다”며 이른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9월에 2차 유행이 덮친다. 가까스로 9월 말 첫 백신이 나왔지만 물량 부족과 공급 불확실성으로 혼란은 가중된다. 이듬해 6월에 이르러서야 “전 세계에서 두 차례 대 유행으로 거의 22억 2,000만 명이 독감에 걸리고 그 가운데 약 3억 6,000만 명이 사망한다. 사망자의 평균 연령은 37세.…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다” 라며 시나리오가 마무리된다. 이를 통해 현실을 유추하자면 올 겨울에 백신이 나오더라도 내년 여름이 끝날 때쯤에라야 한시름 놓을 수 있을 전망이다.
‘안심’은 없다. 책머리에 굵은 글씨체로 도드라지게 쓴 “장담하건대, 다음 감염병이 발생할 것이다” 라는 문장이 엄중하게 읽힌다. 그래서 더욱 눈길 끄는 대목은 책 말미의 ‘생존을 위한 전투 계획’. 저자들은 비장한 어조로 위기행동강령을 순서대로 제시했다. 강령 1호는 “판도를 바꿀 독감 백신을 확보해 전 세계에 접종하라”는 것인데 ‘판도를 바꿀 백신’으로 매년 새로 맞아야 하는 독감 백신이 아닌 범용 독감 백신을 주장한다.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과학 연구라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뒀다”고 강조한 저자 오스터홈은 과학자들의 창의적 상상력, 정책 입안자들의 선견지명과 정책 지원, 기술 지원과 재정투입이 있다면 범용 백신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덧붙여 국제기구를 설립해 항미생물제 내성의 모든 측면을 검토하고, 전염병대비 혁신연합의 범위를 확대해 백신 연구·개발·제조·배포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저자는 올해 새로 쓴 개정판 서문에서 ‘제2의 코로나’라 할 만한 다가올 또 다른 전염병에 대비해야 한다며 환자용 필수 의약품과 인공호흡기, 의료진용 개인 보호 장구 등을 국제사회가 전략물자로 비축해 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니, 경고한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