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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아성 "이제야 연기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왜 이제야 밝은 캐릭터를 맡았나 싶다.

영화 ‘괴물’, ‘설국열차’, ‘오피스’, ‘항거: 유관순 이야기’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라이프 온 마스’ 등 굵직한 작품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묵직한 인물들을 연기해 온 배우 고아성이다. 그런 그가 조금은 가볍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관객들을 만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회사 비리를 고발하는 용기 있는 직장인 여성 이자영을 연기했다. 그는 이자영이라는 맞춤옷을 입은 듯 극을 이끌어가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한다.


15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아성은 “‘항거’ 이후 밝고 명랑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었는데, 정말 그런 영화가 찾아왔다. 제목부터 독특하고 끌렸다”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출연하게 된 당시를 회상했다.

“시나리오 전반부가 명랑하고, 귀엽고, 세 또래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영화여서 긍정적으로 읽기 시작했어요. 영화가 가진 매력은 밝고, 명랑한 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그 안에 진중한 메시지도 있고, 뭉클한 지점들도 많았죠. 20대 후반 여성들이 가진 성장 스토리가 담겨있어서 ‘알찬 영화다’라는 인상이 깊게 남았어요.”

오는 21일 개봉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성장과 우정, 연대를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8년차지만 회사의 말단 직원인 세 친구 자영, 유나, 보람은 대리로 승진을 하기 위해 회사에서 마련한 토익반에 모인다. 하지만 자영이 폐수 무단방류 현장을 목격하고, 이들은 회사가 덮으려는 사건을 파헤치기로 한다.

고아성이 연기한 자영은 삼진전자의 생산관리3부 사원으로 보고서도 척척 쓸 만큼 대졸 대리보다 더 업무 베테랑이다. 그러나 현실은 12초 만에 취향별로 비율을 맞춰 커피를 10잔 타는 신기록 보유자다. 남자 직원들의 구두를 닦아 갖다 나르고, 담배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작고 작은’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영화가 90년대 배경, 레트로 등 중요한 요소들이 많지만, 자영의 캐릭터로서 존재하기보다 모든 사건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도 행복하게 회사를 다녔던 평범한 사원이 피해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정의감을 그려내려고 했죠.”

“자영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자영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8년 째 말단 사원이고, 진짜 해야 할 일은 못하는 상황인데도 자기 일을 사랑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에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화 하나 받을 때도 만족스럽게 받고, 서류를 찾고 정리하는 것도 꼼꼼하게 정성스럽게 하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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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생인 고아성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95년도의 시대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영화에 출연하면서 당시 사회상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했다. 학력과 성별로 차별을 받고, 말단 직원들은 사복이 아닌 유니폼을 입어야 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 그는 가슴이 아팠단다.

“연기를 하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 있어요. 자영이 폐수 무단방류 현장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해 검사에게 다가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라고 하는데, 돌아오는 답은 ‘담배 좀 사다줄래?’였어요. 진심으로 서운했어요. 시대극이나 당시 상황을 다루는 작품을 할 때 고증과 만드는 사람의 태도가 병행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 초반에 자영이 회사에 출근해서 쓰레기부터 치우고 심부름을 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면만 제시됐다면 고증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 장면에서 김원해 선배가 ‘왜 남의 일을 우리한테 시키고 그래?’라는 대사가 겹쳐지는데, 이게 감독님이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의 결을 그때 알게 되기도 했죠.”

고아성에게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영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든든한 동료 배우들을 만났고, 내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행복한 촬영현장이었어요. 또래 배우들이 함께하니 에너지가 넘쳤죠. 이솜, 저, 박혜수 모두 두 살 터울이지만 영화의 취지에 맞게 아메리칸 스타일로 다 친구로 지냈어요. 진짜 친구처럼 지내서 정말 저희의 친한 모습이 담긴 느낌이었죠. 그렇다 보니 에너지가 없던 사람인 제가 많이 바뀌었어요. 씩씩해졌어요. 항상 MBTI 검사를 하면 I(내향형)이 나왔었거든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다들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MBTI 검사를 다시 해보니 E(외향형)이 나왔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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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주연배우들 외에도 토익반에 수 십 명의 단역 배우들이 출연한다. 그들 중 한 명이 보낸 편지는 고아성의 눈물샘을 터뜨렸고, 아직까지도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함께 촬영한 토익반 친구 중 한 명인데, 저랑 교류가 없었거든요. 근데 그 분이 저에게 편지를 써준 적이 있는데, 그 편지를 읽고 엉엉 울어서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죠. 그분이 이 인터뷰를 보실진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국희라는 친구인데 편지에 ‘언니는 며칠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쓰여 있었어요.”

4세 때부터 아역으로 활동을 시작한 고아성은 성인연기자로 발돋움 해 작품을 이끄는 주연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역배우를 할 때부터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또 현재 여성 캐릭터가 주가되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추세지만 과거에는 그런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고.

“아역배우 당시 시나리오에 그려지는 청소년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청소년이었어요. 저는 당시 청소년이었지만, 실제 청소년이 겪는 삶, 고민이 이게 전부가 아닌데 왜 현실과 다르게 그려질까 생각했죠. 주로 어른들이 생각하는 청소년의 모습이 그려지니까 답답함이 해소되지가 않더라고요. 또 작품에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 또한 진짜 사람이라고 느껴진 적이 많이 없었어요. 그래도 근 2~3년 전부터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여성 캐릭터가 없다고 불평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제 역할은 거기에다 웰메이드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작품을 통해 진짜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고 싶어요.”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인터뷰 내내 영화 속 자영의 얼굴과 태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아성이다. 스스로를 ‘자영처럼 정의롭고, 이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고아성은 내면에서 자영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차기작을 할 때까지 전작의 톤을 유지해요. 연기만 본업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인터뷰하고, 예능에 출연해 홍보하는 것도 즐겁고. 이 또한 본업이라고 생각하죠. 연기를 하지 않으면 정신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요. 그냥 저 고아성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오히려 리듬이 깨지는 느낌이에요. 영화가 엎어졌던 일이 있어서 오랫동안 연기를 안 했던 적이 있는데, 뭔가 허전함을 느꼈는데 그게 연기를 안 해서 그랬던 거였어요.”

어느덧 30대를 앞두고 있는 고아성. 그는 앞으로의 배우 생활이 더욱 기대가 되고,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이제야 배우로서 이 일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단다.

“예전엔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20대 초중반 때 다양한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최근 몇 년 동안 임했던 세 작품 정도는 한 마음이었어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의 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같았죠. 30살이 되면 그렇게 큰 변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궁금해요. 좋은 작품들을 만나고 싶어요.”

“이제는 말 할 수 있어요. 연기를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죠.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어떻게 잘 연마해 갈까 고민이 많아요. 사실 예전엔 확신이 없었어요. 너무 어릴 때부터 시작을 해서 이 일이 좋지만 내가 선택한 일은 아니었거든요. 그냥 좋아서 이어졌던 것 같아요. 아직도 믿기진 않지만 저보다 어린 친구들도 많아졌고, 책임감도 생겼어요.”

마지막으로 온 애정을 쏟아 연기했던 자영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어봤다.

“책임감이 있다는 건 피곤한 일인 것 같아요. 여기저기 오지랖을 부리면서 다니면 자신이 통제해야 될 부분이 늘어나는 건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들고. 그렇게까지 노력을 해서 만족하면 좋겠지만, 책임감이 과하게 많은 사람은 만족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렇지만 ‘너무 잘했고, 자랑스럽다’고도 하고 싶네요.”

이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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