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급락(원화 강세·달러 약세)하면서 달러예금에 이달 들어서만 4조원 가까운 뭉칫돈이 몰렸다. 환율이 달러당 1,000원대로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결국에는 오를 것으로 보는 자산가와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수요가 늘어나자 시중은행들도 각종 상품을 내놓으며 ‘달러예금 유치전’에 나서고 있다.
23일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은행에 따르면 이달 15일까지(신한은 21일까지) 이들 은행의 달러예금 잔액은 477억6,700만달러로 지난 9월 말보다 34억100만달러 급증했다. 절대 잔액은 올 들어 최고치다. 증가폭도 원화로 환산하면 3조8,600억원에 달했다.
세부적으로 A은행이 보름 사이 21억4,700만달러(약 2조4,400억원)나 늘어나 가장 큰 증가폭을 보였고 B은행도 5억2,600만달러(약 6,000억원) 불어났다. 금액은 개인과 기업의 달러예금 잔액을 합한 수치다.
이는 ‘환율이 결국 오를 것이므로 낮을 때 미리 사두자’는 심리가 확산한 결과로 분석된다. 가령 환율이 달러당 1,130원일 때 1달러를 산 사람은 나중에 환율이 1,200원으로 오르면 앉아서 70원의 차익을 얻는다. 원·달러 환율은 6월 달러당 1,210원(월평균)이었지만 22일 종가는 1,133원이었다. 넉 달 새 70원 넘게 급전직하하며 1년 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중국의 경기 회복세가 예상보다 양호해 위안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통상 위안화와 같이 움직이는 원화도 강세를 나타냈다. 또 미국의 추가 경기부양책이 예상되며 전 세계 외환시장에서 달러가 주요 통화 대비 약세를 나타내는 상황이다.
시중은행의 한 자산관리 본부장은 “환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고객들은 오히려 지금이 달러를 살 수 있는 저가 매수 기회라고 보고 달러예금액을 늘리고 있다”며 “자산가뿐만 아니라 법인 쪽 달러예금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역사적인 경험에 비춰볼 때, 외환당국이 환율 하락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달러를 사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일선 프라이빗뱅킹(PB)센터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정성진 국민은행 PB팀장은 “달러예금은 이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자수익보다는 환차익을 기대하고 투자하는 사람이 많다”며 “달러화로 표시되는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사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의 한 PB는 “자신의 포트폴리오에서 달러 자산이 부족해 투자를 늘리려고 마음먹었던 고객들이 그동안 환율이 1,200원대에서 움직이면서 매수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환율이 떨어지자 보유를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중에 돈은 많이 풀렸는데, 각종 규제로 부동산 투자의 길이 좁아진 것도 달러예금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시중은행들도 경쟁적으로 관련 상품을 내놓고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국민은행은 비대면으로 외화예금에 가입한 고객에 포인트를 주는 이벤트를 다음 달 30일까지 진행한다. KB스타뱅킹에서 ‘외화보통예금’이나 ‘KB글로벌 외화투자통장’에 가입한 고객 중 인터넷뱅킹을 통해 1,000달러 이상 외화를 환전해 입금한 고객 2,000명(선착순)에게 1만포인트를 지급한다.
하나은행은 지난달 초 ‘일달러 외화적금’을 출시했다. 한달여 만에 가입 계좌 수 1만개, 가입금액 100만달러를 돌파했다. 가입기간은 6개월이고 매달 최대 1,000달러까지 납입할 수 있다. 가입 후 1개월이 지나면 현찰 수수료 없이 달러 지폐로 찾을 수도 있다. NH농협은행 역시 16일부터 원화 적금과 동시에 가입하면 0.1%포인트의 우대금리를 주는 ‘NH주거래우대 외화적립예금’을 출시했다. 다음 달 말까지는 입금, 지급거래 때 환율 우대를 90%까지 적용한다.
다만 무분별한 달러 투자는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시장에서는 조 바이든 미 민주당 대선 후보가 11월 선거에서 당선되면 미중 무역분쟁의 파고가 다소 누그러지면서 위안화가 강세를 보이고, 원·달러 환율도 1,100원대가 깨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환테크는 글로벌 투자은행(IB)도 수익을 내기 어려운 고난도의 분야”라며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