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보다 수성이라고 한다.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미 이룩해 놓은 사업을 지켜간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자서전 ’호암 자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호암은 한평생을 바쳐 이룩한 삼성을 누구에게 계승시켜야 할지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능력과 자질을 지닌 셋째 아들 고(故)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1987년 호암 타계 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창업 보다 어렵다는 수성에 성공한 것을 넘어 ’제2의 창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장 취임 당시 매출 9조9,000억원이던 삼성그룹은 2014년 400조원으로 40배나 늘었다.
특히 글로벌 무대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삼성전자(005930)가 휴대폰과 디지털TV,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창조적 파괴‘를 통해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주문한 이 회장의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같은 삼성전자의 ’거대한 전환‘을 이끈 계기는 1993년 6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으로 제2 창업 주도=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사내방송팀(SBC)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본 이 회장은 격노했다. 테이프에는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아 직원들이 칼로 깎아 내는 장면 등 불량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당장 서울로 전화를 걸어 사장들과 임원들을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켰다. 그는 중역들에게 ”1979년부터 불량은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부회장, 후계자라는 핸디캡 때문에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며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지나서도 ’불량은 안 된다, 양이 아니라 질로 향해 가라‘고 했는데 아직도 양을 외치고 있다“며 질타했다. 그리고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은 물론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었다.
1990년대 초 삼성전자는 국내에서조차 명실상부한 1등이 아니었고 해외에서도 삼성 제품은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특히 미국 양판점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본 이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종업원을 몇 만 명씩 거느리면서 자동화 시설 등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서도 400억~500억원 밖에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면서 임직원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이 회장은 ’양 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신경영으로의 전환을 위해 솔선수범했다. 수백명의 중역들을 미국, 일본, 유럽 등지로 데리고 다니며 삼성의 현주소를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변화에 대한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를 전격 도입했다. 오후 4~5시에 일과를 끝내고 남는 시간에 운동이나 어학공부 등 자기계발을 하도록 유도했다. 종업원 삶의 질을 높여야 제품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또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할 때까지 생산을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하는가 하면 1995년에는 500억원어치에 해당하는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불태우는 ’휴대폰 화형식‘을 지시하기도 했다. 모두 질 경영을 위한 이 회장의 충격 요법이었다.
◇디자인.창조경영 등 시대 앞선 통찰력=이 회장의 신경영은 ’디자인 경영‘과도 맥이 닿아 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왜 소니는 멀리서 봐도 소니고 파나소닉은 멀리서 봐도 파나소닉인데 삼성 제품은 아직도 이름을 보고 확인해야만 하는가“라고 일갈하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회장은 1996년’디자인경영의 해‘를 선포했다.
이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이며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한다“며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야말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95년 그룹 내 디자인 학교인 ’SADI‘를 설립한 데 이어 2005년 4월 주요 계열사 사장들을 이탈리아 밀라노로 불러모아 디자인 전략회의를 여는 등 초일류 기업을 향한 디자인 경영을 독려했다. 다른 기업들이 2000년대 중후반이 돼서야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디자인 분야에 투자를 강화한 것에 비춰볼 때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경영과 디자인경영은 이후 ’창조 경영‘과 ’마하 경영‘로 이어졌다. 창조경영과 마하경영은 이 회장이 2006년 사장단 회의에서 처음 던진 화두다.
제트기가 음속(1마하=초속 340m)을 돌파하려면 설계도는 물론 엔진·소재·부품을 모두 바꿔야 하는 것처럼, 삼성도 선진 기업을 추월해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려면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 계열사들이 개념 정립을 마치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확산에 나선 상태에서 이 회장이 타계하면서 마하경영은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전 임직원들이 반드시 안착화시켜야 할 유훈이 됐다.
◇’거안사위‘ 위기의식은 필생의 화두=2002년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일본의 소니를 추월한 기념비적인 해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삼성이 소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자 이 회장은 “누가 이런 얘기를 언론에 떠들고 다니는가. 우리가 소니를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역정을 냈다.
이 회장은 같은 해 6월 용인의 인력개발원으로 사장단을 소집했다. 이날 회의의 백미는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난다“는 이 회장의 발언이었다.
이 회장에게 위기의식은 평생의 화두였다. 그 위기의식이 지금의 삼성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의 신경영 선언도 삼성이 그저 그런 회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려도 이 회장은 자만에 빠지기 보다는 ’잘 나갈수록 위기를 생각하라‘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변화와 혁신의 선두에 섰다.
이 회장은 2003년 7월 직접 사장단을 이끌고 노키아를 방문하고 온 뒤 전자 사장단 회의에서 ”세계 1등이 되려면 근육을 바꾸고 걸음걸이, 자세도 바꿔야 한다“며 ”뼛속까지 변화하라“고 주문했다.
또 2005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로 전자 사장단을 불러 디자인 전략회의를 가진 데 이어 같은 해 7월 한남동 자택에서 윤종용 부회장 등 경영진과 만찬을 함께 하면서 ”삼성 TV는 왜 1등을 못하는 겁니까“라고 물으며 ’TV 1등‘을 달성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앞서 이 회장은 2003년 전체 판매량의 27%를 차지하던 브라운관 TV 생산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당장 매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PDP·LCD 등 디지털TV로 승부를 걸라는 주문이었다.
삼성전자는 ’TV일류화프로젝트팀‘을 구성하고 반도체 부문의 시스템LSI 인력 200여명을 TV사업부로 일원화하는 등 조직개편을 단행하는 등 TV 1등을 위한 행보에 나섰다. 이 회장의 혜안과 승부수가 먹혀 들어 삼성전자는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보르도TV‘가 출시된 2006년 세계 TV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1969년 흑백 TV를 생산한 지 37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TV 부문에서 삼성이 ’빠른 추격자‘에서 ’시장 선도자‘로 변모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경영복귀 후 출근경영으로 휴대폰 1위 이끌어=글로벌 휴대폰 시장은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요동쳤다. 피처폰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의 점유율이 급락했고 삼성의 점유율도 곤두박질쳤다. 여기에 이 회장이 삼성 특검 여파로 2008년 4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터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이 회장이 다시 나섰다.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의 일성은 비장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삼성도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 회장의 지시로 무선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한 삼성전자는 주력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구글 안드로이드로 전환하고 2010년 5월 첫 스마트폰인 ’갤럭시 S‘를 재빠르게 내놓았다. 갤럭시S는 7개월 만에 전세계에서 1,000만대가 팔려 삼성전자의 첫 ’텐밀리언셀러 스마트폰‘이 됐다. 갤럭시 시리즈로 삼성전자가 무섭게 추격해오자 놀란 애플이 무차별적인 특허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이 회장은 2011년 4월 출근 경영을 시작하며 변화와 혁신을 독려했고 삼성전자는 2012년 총 4억대의 휴대폰을 팔아 점유율 25.2%로 세계 정상에 등극했다.
휴대폰 세계 1위를 달성했지만 삼성전자는 어떤 축하 파티도 열지 않았다.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을 호령하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마이크로소프트와 레노버에 매각되는 신세가 된 것도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방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신경영 20주년을 맞은 2013년 4월 해외 경영구상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 회장은 여전히 위기감과 도전의식을 강조했다.“이제 20년이 되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