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종 명복이 돌아왔다. 경여의 처가 찰떡을 쪄서 보냈기에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 또 베갯모를 팔아서 벼 8말, 콩 3말 5되를 얻어서 짊어지고 왔다. 다만, 다시 재어 보니 1말이 모자란다. 분명 명복이 훔쳐먹은 게다. 괘씸하고 얄밉다. 콩은 짊어지기에 무거워서 가져올 수 없었다고 한다.’(1593년 10월30일)
‘쇄미록’은 조선 양반 오희문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9년3개월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피란을 다니며 쓴 일기다. 쇄미록이라는 제목은 중국 ‘시경(詩經)’의 쇄혜미혜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풀이하면 ‘보잘 것 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다. 당시엔 한 개인의 소소한 일기에 불과했지만 세월이 흘러 쇄미록은 이순신 ‘난중일기’나 류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기록물 중 하나이자 보물(제1096호)로 대접받게 됐다.
쇄미록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평범한 양반이 전란 와중에 쓴 개인 차원의 기록물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투 최전방의 생생함은 없지만, 당시 후방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통에 쓰였기 때문인지 오희문은 평소라면 기록하지 않았을 일상의 소소한 기록을 중심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이어가고 있다.
책에는 가장 중요한 먹고 사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 누가 어떤 먹을거리를 선물로 보내왔는지 등 음식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특히 충청도 임천(부여)과 강원도 평강에 머물며 농사를 지을 때는 마치 촌부의 농사일기처럼 어떤 작물을 키우고 수확했는지를 상세히 기술했다. 오희문은 그의 일기에서 ‘오랜 가뭄 뒤에 이처럼 큰 비가 내렸으니, 밀과 보리가 살아날 뿐만 아니라 지대가 높고 마른 논에도 거의 물을 댈 수 있겠다. 농사의 기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가사 노동부터 편지 전달까지 양반의 수족 역할을 했던 노비도 주요 이야깃거리다. 말과 노비가 없어 길을 떠나지 못하거나 문상을 가지 못하는 상황, 노비를 끊임없이 게으름 피우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로 묘사하며 괘씸해하는 장면, 충직한 사내종이었던 막정이 죽자 불쌍해 제사를 지내주는 인간적인 모습까지 오희문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양반에게 가장 중요한 제사를 지내는 일부터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일상처럼 기록돼 있다. 피란 전까지 처가살이를 한 오희문이 처가 제사까지 꼼꼼히 챙기는 모습을 통해 처가살이를 당연시 여긴 당시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책에서 오희문은 조정에서 발행한 조보(朝報)를 통해 임진왜란의 전황과 명나라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을 통해 신립, 원균, 이순신, 의병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같은 임진왜란 영웅들의 이야기와 이들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다.
1591년 11월27일 한양에서 출발하면서 시작된 일기는 1601년 2월27일 그가 한양으로 돌아오고 그의 셋째 아들 며느리가 손자를 낳았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신간은 총 7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쇄미록을 한 권으로 엮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총 3,368일간의 한 사람의 여정을 통해 조선 시대의 삶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1만5,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