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항공빅딜의 두 얼굴, 국영화와 특혜 사이

<김영기 논설위원>

'산업 혈관' 살리는 유일한 선택지

수조원 혈세 투입 아깝지 않으려면

산은, 경영 개입의 유혹 떨쳐내고

산업 구조조정 시발점으로 만들어야




외환위기의 격랑이 몰아치던 지난 1999년 1월6일. 김대중 대통령이 구본무 LG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조기 졸업을 위해 꺼낸 5대 그룹 빅딜이 진척되지 않자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이다. 30분여의 면담 막바지, 구 회장은 눈물을 삼키며 LG반도체 지분 100%를 현대전자에 넘기겠다고 밝혔다. ‘하이닉스’로 이름을 바꾸며 도약을 꿈꿨지만 통합회사에는 더 센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황이 나빠지며 천문학적 적자에 빠졌고 결국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팔릴 위기에 몰렸다. 훗날 SK에 인수돼 ‘굿 딜’의 전형으로 보이지만 하이닉스는 20년 넘게 생살을 도려내는 구조조정의 파고를 견뎌내야 했다.

반도체와 함께 진행된 다른 구조조정도 험로의 연속이었다. 당시 120여 워크아웃 기업 중 상당수가 절멸의 길을 걸었다. 작고한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은 12개의 육성 테이프에서 정치적 게임에 휘말린 빅딜의 모순을 질타하기도 했다. 그만큼 빅딜의 과정은 지난하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는 반도체 빅딜 이상의 시련을 예고한다. 산업은행은 끝까지 3자 매각에 미련을 가졌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터널에서 아시아나의 운명은 실상 정해져 있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손실을 감내하며 아시아나를 품에 안을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업의 혈관’인 수송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승자의 저주를 극복할 방법은 같은 업종인 대한항공을 주인으로 세우고 정부가 다리가 되는 것뿐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국유화의 위험을 내포할지언정 정부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부는 이미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세계 7위의 선사 한진해운을 무너뜨려 3년 반 만에 수출할 배조차 구하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아시아나를 포기하는 것은 국가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일이다. 금융 논리에 빠져 기간산업을 포기하는 것은 한진해운 하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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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산은이 한진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개입의 손을 내밀 경우 ‘국영(國營)의 덫’에 스스로 빠지는 것이다. 물론 산은은 끊임없이 개입의 유혹에 시달릴 것이고 사회도 방관자에 그치도록 놔둘 리 없다. 특혜 시비가 나오기 무섭게 예상대로 산은은 사전 경영협의 등의 7개 ‘이행 각서’를 한진에 청구했다. 투자 합의를 어기면 5,000억원의 위약금을 물리겠다고 엄포도 놓았다. 무늬만 민간이지 준(準) 국영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지금까지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더라도 더는 안 된다. 산은은 두 회사의 경영이 정상화되면 최대한 빨리 민간에 지분을 넘기고 ‘선관의 의무’를 중단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산은도 한진도 수송 산업도 살릴 수 있다.

조원태 한진 회장도 꽃놀이패를 쥔 것이 아니다. 조 회장은 산은을 경영권 방어의 백기사로 둔 효과를 훨씬 뛰어넘는 부담을 짊어졌다. 조금이라도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 사회는 조 회장에게 기회를 다시 주지 않을 것이다. 산은이 개입의 손을 내밀 틈을 주지 않을 만큼 치열한 구조조정과 경영 합리화 작업을 하는 것만이 조 회장의 살길이다.

항공 빅딜은 한편으로 문재인 정부에도 중요한 도전의 시작이다. 정부는 1년 전 5대 분야 구조개혁을 얘기하며 산업혁신을 꺼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좀비 기업을 퇴출하고 신산업에 자금을 집중 투하해 경제에 피를 돌게 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만들어준 기업 옥석 가리기의 기회마저 날렸다. 각국의 시가총액 상위 기업이 바뀌고 미래형 기업이 쏟아지는데 우리는 주력기업 몇 곳만 바라보고 있다. 항공 빅딜은 정체된 산업 구조조정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지만 국가 산업의 패러다임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항공 빅딜이 산업 혁신을 통해 미래세대가 먹고살 길을 만드는 물꼬만 열 수 있다면 두 항공사에 들어갈 수조원의 혈세는 결코 아깝지 않다. young@sedaily.com

김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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