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19일 밤 9시45분, 이스라엘 텔아비브 외곽 벤구리온 공항.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일행을 태운 전용기가 내려앉았다.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과 전직 수상들이 한 줄로 늘어서 사다트를 맞았다. 사다트는 거침이 없었다. 이스라엘 방문 계획을 ‘위험한 사기극’이라며 전군에 경계령을 발동한 참모총장을 소개받고는 ‘보세요. 진담이었죠’라고 말했다. ‘마귀할멈’이라고 불렀던 골다 메이어 전 수상에게는 이런 인사를 건넸다. ‘마담, 저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사다트의 전용기가 이스마일리아 공항을 출발해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불과 45분. 지척인 두 나라가 대화하기까지는 이스라엘 국가 수립(1948) 이후 29년 세월이 흘렀다. 전면전만 4차례 치른 만큼 반대도 많았다. 카이로에서는 연일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고 외무부 장관은 사표를 던졌다. 후임 장관도 출근하지 않았다. 아랍연맹 국가들은 사다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리비아는 외교관계를 끊었다.
국내외 반발이 일기 시작한 것은 11월 초 이집트 의회 연설. ‘어린아이들과 장병들을 보호할 수 있다면 땅끝까지 갈 수 있다. 크세네트(이스라엘 국회)도 예외가 아니다’는 사다트의 연설은 세계적인 파장을 불렀다. 이스라엘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사다트를 공식 초청했고 19일 밤 역사적인 방문이 이뤄졌다. 사다트는 왜 불구대천의 원수들에게 갔을까. 이스라엘을 압도할 군사력 건설이 불가능하며 낙후된 경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다트의 전격 방문으로 물꼬를 튼 중동평화회담은 이듬해 가을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거쳐 1979년 평화협정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애매하게 남겼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다. 사다트는 혹독한 대가도 치렀다. 1981년 열병식 도중 이스라엘과 공존에 반대하는 극렬이슬람주의자 군인 3명에게 총 맞아 죽었다. 사다트는 비명에 갔어도 그가 뿌린 양국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최근 아랍에미리트와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는 등 아랍권과 평화교섭에 나서는 분위기다. 좋은 현상이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무리 강한들, 언젠가는 패할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처럼 상호 증오가 깊다면 이스라엘이 어쩌다 패배하는 날이 국가 소멸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타키투스 또는 에라스무스가 한 말로 인용되는 이 구절의 원전은 유대 격언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