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말과 소년 기수’. 추정가는 1억2,000만~3억원. /사진제공=케이옥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백신 개발 이후의 낙관론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미술시장이 암중모색 중이다. 10억원 이상의 고가 미술품 구매가 주춤한 것은 사실이나 미술품 구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미술품이 팔리는가. 경제 불황기에는 미술사적으로 검증된 유명 작가의 작품은 가격 상승 여지가 높은 안전 자산으로 더욱 선호된다. 이름값 높은 작가가 불황 모르고 팔리는 이유다. 또한 2030의 밀레니얼 세대가 미술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하면서 온라인 활동에 능한 이들이 적극적으로 작품구매에 나서는 것도 청신호로 분석된다. 세계 최정상 아트페어인 아트바젤과 글로벌 금융회사 UBS가 최근 발표한 ‘2020 세계미술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고가 미술품 컬렉터 중 49%가 밀레니얼(23~38세)로 집계됐다. 국내에서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올 상반기 미술품 경매시장은 전년 동기 대비 40% 수준으로 급감한 반면 온라인 거래는 오히려 증가했다.
오는 25일 올해의 마지막 메이저경매를 개최하는 케이옥션 출품작의 키워드는 ‘거장’이다. 거장 혹은 마스터로 불리는 유명작가들은 향후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가 높고 하락 가능성이 적은 편이다. 또한 경기 불황 때문에 급하게 시장에 나오게 된 거장의 희귀작일 경우 수집가 입장에서는 ‘횡재’에 가까운 기회를 얻게 된다. 케이옥션은 이번 경매에 총 176점 약 130억 원 어치를 내놓았다.
권진규의 테라코타 ‘상경’. 추정가는 2억5,000만~5억원. /사진제공=케이옥션 좀처럼 작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던 권진규의 조각이 9점이나 새 주인을 찾는 자리라 쏠리는 관심이 남다르다. 권진규미술관 건립을 위해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갔다가 대부업체 담보로 잡혔던 권진규의 작품과 기록물 700여점을 되찾아오기 위해 유족이 그 중 일부인 8점을 내놓기로 한 것. 작품 반환 소송에서 법원은 40억원을 받고 작품을 돌려주라며 유족 손을 들어줬고, 유족은 자산매각과 대출로 30억원을 변제한 후 나머지 10억원 마련을 위해 고육지책을 택했다. 대부업체 수장고에서 되찾은 작품들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돼 내년 6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이번 경매에는 상경, 혜정, 선자 등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테라코타 인물상 3점, 사람과 말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기마상 1점, 희귀작인 테라코타 추상 부조 4점과 나무 초상 조각 등 총 9점이 출품됐다. 낮은 추정가 합계가 14억원 규모다.
권진규의 테라코타 부조 ‘작품(인체4)’. 추정가는 1억4,000만~3억원. /사진제공=케이옥션 조각가 권진규는 우리 교과서 뿐만 아니라 일본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릴 만큼 중요한 예술가다. 권진규는 1971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면서 “우리 조각은 신라 때 위대했고 고려 때 정지했고 조선조 때는 바로크화(장식화) 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돼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며 신념을 드러냈다. 흔히 조각을 청동이 완성형이라 생각하지만 작가가 손으로 직접 빚는 것은 석고나 테라코타다. 특히 권진규는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는다”면서 “작가로서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고 브론즈같이 결정적 순간에 딴 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게 없다는 점”을 중시했다. 권진규가 남긴 테라코타는 약 200여 점에 불과하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날으는 새’. 추정가는 9~17억원. /사진제공=케이옥션 오지호 ‘금강산 보덕암’. 추정가는 3,000만~1억원. /사진제공=케이옥션 한 인상주의를 정립한 오지호의 1936년작 ‘금강산 보덕암’(3,000만~1억원)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화가의 1930년대 작품이라 사료적 가치도 높다. 일본에서 유학했으나 일제가 주관하는 전시에 참여하지 않고 민족주의적 활동을 하다 36세에 요절한 황술조의 작품으로, 1980년 미술잡지 표지에도 실렸던 ‘정물’(8,000만~1억5,000만원)도 경매에 오른다. 조선인 최초로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3인 중 한 명이었던 신홍휴의 ‘정물’(600만~1,500만원)을 비롯해 황영진, 함대정, 홍종명 등 경매에서 만나기 어려운 근대기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김환기의 1958년작 ‘항아리와 날으는 새’(9억~17억원)와 이중섭의 1954년작 ‘물고기와 석류와 가족’(8억 5,000만~15억원)도 새 주인을 찾는다. 출품작들은 경매 당일까지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사옥에서 진행되는 프리뷰를 통해 예약제로 실물을 볼 수 있다.
이중섭 ‘물고기와 석류와 가족’. 추정가는 8억5,000만~15억원. /사진제공=케이옥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