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이 열린 지난 1988년 우리나라의 에너지 자급률은 40%쯤 됐다. 가정용 난방 연료를 국내산 무연탄으로 자급자족한 덕분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현재 자급률은 5%에 불과하다. 국내에서 생산한 무연탄을 밀어내고 해외에서 석유와 가스 등 값비싼 화석 에너지를 수입한 결과다. 세계에너지협의회(WEC)가 올 초 발표한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 순위(2019년 기준)는 125개 국 가운데 69위. 이 와중에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국제적 압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동시에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세계에너지경제학회 부회장과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허은녕 서울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를 30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나 에너지·자원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 등 도전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들어봤다.
-미국의 셰일 가스 혁명을 계기로 장기 저유가 시대를 맞고 있는데 언제까지 저유가가 이어질까.
△현재 국제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선이다. 이 가격대는 셰일 가스가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저유가라기보다는 시장 메커니즘에 부합하는 적정 가격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제 유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요인은 수요다. 지금처럼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친다면 당장 석유 수요가 증가하기 어렵다. 분명한 점은 그런 사이클이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나면 국제 유가는 확 치고 올라갈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팬데믹 종식 시기가 언제인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1~2년 정도 (수요 둔화의 사이클이) 지속될 것 같다.
-이명박(MB) 정부 시절 해외 자원 개발 투자에 나섰다가 공기업 부실과 혈세 낭비를 초래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목표량 확보에 너무 집착했다. 바로 자주 개발률이다. 경제성이 있든 없든 목표 대비 실적 채우기에 급급했다. 이러다 보니 손해를 보더라도 버티며 쥐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해외로 나간 민간 기업들은 더 이상 돈이 안 될 것 같아 해외 광구를 중도 매각했다. 공기업들은 실적을 채우느라 민간 매각 물량까지 덥석 받았다. 해외에서 자원을 확보하려는 계획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유연성이 부족한 집행이 문제였다.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의 합리성도 떨어졌다.
-앞으로 해외 자원 개발 전략은 어떻게 짜야 하나.
△수요자 중심의 개발이 필요하다. 여기서 수요자는 개발한 자원을 직접 소비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기업을 말한다. 그게 공기업이든 민간 기업이든 상관없다. 수요자 중심의 전략은 물량 확보와 가격 변동 등 자원 개발의 양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적합하다. 철광석을 캐서 철강을 만드는 포스코는 해외 자원 개발의 본보기다. 철광석 가격이 오르면 완제품 가격에 전가할 수 있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개발 경제성 개념도 철저하게 확립된다.
-그렇다면 수요처가 없는 한국광물자원공사와 한국석유공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자원 공기업의 기능 재편이 요구된다. 광물자원공사와 석유공사는 원래 사업하는 곳이 아니라 진흥 기관이었다. 광물자원공사의 전신은 대한광업진흥공사다. 석유공사는 석유 비축 사업 외에 민간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다 MB 정부 때 다들 ‘플레이어(개발자)’로 나섰다. 이 때문에 자원 분야에서는 플레이어만 있고 진흥 기관은 단 한 곳도 없다. 어떤 형태로든 제3자적 관점에서 남을 도울 기관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적정 유가’라면 해외 자원 개발에 나서야 하지 않나.
△시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물건’이냐의 문제다. 좋은 물건이라는 개념은 경제성 외에 국내 반입 여부 등 다양한 잣대가 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의당 투자해야 한다. 다만 석유 등 화석 에너지는 시장에서 물량이 넘쳐난다. 생산 비용이 배럴당 30달러대의 좋은 광구를 찾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배럴당 50달러쯤 돼야 개발 유인이 생길 것 같다. 하지만 리튬과 코발트 등 신산업 전략 광물은 상황이 다르다. 삼성과 LG 등 수요 기업이 고군분투하지만 3년 전 코발트 가격 폭등 이후 장기 계약으로 전환한 게 전부다. 4차 산업혁명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적극적인 확보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은 신산업 전략 광물이 구체적으로 지정돼 있지도 않은 상황이다. 이제 막 선정하려는 단계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이미 20~30개의 핵심 광종을 선정하고 자원 민족주의와 수급 불안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공기업 주도의 과거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2050년 탄소 중립’을 선언했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본다면 선언 자체는 나쁘지 않다. 웬만한 나라들은 다 했다. 일본과 중국도 각각 2050년과 2060년 탄소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언일 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얼마 전 공청회에서 패널들이 ‘선언만 있지 계획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진짜로 계획하면 안 된다. 못할 것이고 안 할 것이고 그게 맞다. 그대로 실행하면 큰일 날 거다. 고비용 구조에 경제부터 버티지 못한다. 세계의 이목이 있으니 선언했다고 본다.
-탄소 순배출을 제로로 만들려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최소 60% 이상 끌어올려야 하는데.
△재생에너지 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오르는 순간 그런 수치는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 20%를 달성한다는 ‘3020 에너지 전환 계획’ 역시 마찬가지다.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치를 여태껏 달성한 적이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재생에너지 정책은 목표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 관련 산업을 육성해야 하느냐, 아니면 보급 확대에 치중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이명박 정부 때는 녹색 성장이라고 해서 산업 육성에, 박근혜· 문재인 정부 때는 보급 확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의 사례를 보면 자국의 탄탄한 산업 생태계가 뒷받침돼야 보급도 성공한다. 보급 확대에 치중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대표적인 국가가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여서 정부가 보급 확대에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정부 보조금이 끊기자 보급도, 산업도 위축됐다. 반대로 독일은 재생에너지 산업이 뒷받침돼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관련 산업을 육성해 해외에 수출할 정도가 돼야 보급 확대 비용을 상쇄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말인데.
△맞는 방향이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 걱정스럽다. 관련 산업 육성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태양광은 보급을 늘릴수록 중국산 수입이 늘고 풍력은 유럽산 수입이 느는 구조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급격히 늘리면 경제성이 떨어져 비용만 더 든다. 재생에너지를 한국전력이 더 많이 사준다면 구태여 효율성과 경제성 제고를 위해 기술 개발과 산업화를 할 이유가 만무하다.
-당장 전기 요금이 문제가 될 텐데.
△재생에너지 비율을 급격히 늘리겠다면서 요금 체계를 손보지 않는 것은 난센스다. 유럽의 전기 요금은 우리나라의 2~2.5배 높아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전기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결국 재정을 동원해야 한다. 우리나라 재생에너지는 보조금 없이 굴러가지 못한다. 현재 재생에너지 보조금은 전기료에 붙는 전력기반기금을 활용하는데 이 기금이 바닥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결국 정부 재정을 동원하는 길밖에 없다. 이건 조삼모사다.
-원전은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는다. 탈(脫)원전과 탄소 중립은 엇박자가 아닌가.
△탄소 중립을 선언한 한국과 일본·중국 3개 국 모두 원전을 돌린다. 다 이유가 있다. 인구밀도가 높아서다. 에너지 역시 밀도를 높이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한다. 원전은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밀도가 가장 높다. 태양광으로 국내 전력 수요를 다 충당하려면 광역 단체 한 곳에 통째로 패널을 깔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밀도 높은 전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집집마다 태양광 패널을 다 설치하고 전기 요금도 지금보다 2~3배 더 부담해도 먹고 사는 데 아무 불만이 없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탈원전·탈탄소 등) 에너지 전환은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이행해야 연착륙한다.
-바람직한 에너지 믹스 전략은 무엇인가.
△교과서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에너지 믹스로 가려면 경제성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데 결국은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국민이 에너지 비용을 얼마나 부담하느냐의 문제다. 독일 국민은 사회적 합의 절차를 거쳐 기꺼이 탈원전 방향에 동의했다. 독일의 전기 요금 체계에는 ‘그린 프라이싱(green pricing·녹색요금)’이라는 개념이 있다. 재생에너지 비용을 얼마나 부담할지 국민이 선택하도록 한 제도다. 우리의 요금 고지서에는 이런 비용이 아예 없다.
-에너지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역대 정권마다 에너지 분야는 정부와 공기업의 영역으로 꽉 붙잡고 있다. 김대중(DJ) 정부 때 전력산업 구조개편 이후 에너지분야에선 이렇다 할 혁신이 없다. 오죽 없으면 전기자동차를 에너지 신산업으로 부를까 싶다. 아직도 한전 검침원이 전력사용량을 체크하는 게 단적인 사례다. 한전의 전력망은 정보통신(IT)과 결합하면 무궁무진한 서비스를 할 수 있는 데도 말이다. 그래서 KT가 한전의 전력 소매판매 업무를 개방하라고 요구까지 한다. 혁신과 효율성은 없고 정부는 (탈원전·재생확대) 전환만 외치고 있다. 에너지 안보는 해외 자원개발 문제만이 아니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자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자원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원·환경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에너지대책·산업 분과 전문위원과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정부의 에너지·자원 정책을 자문했다. 세계에너지경제학회 부회장에 이어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