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는 북한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곳에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설치된 곤돌라를 타고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민간인이 군이나 정부의 허가 없이 갈 수 있는 마지막 한계 지점인 임진각. 남북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난 1972년에 북한 실향민을 위해 당시에 1번 국도를 따라 민간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끝 지점에 세워진 관광지다. 판문점과 다르게 별도의 허가 절차 없이 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주로 실향민들이 찾던 곳이지만 여기가 끝이었다. 이 때문에 설 명절이나 새해가 되면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멀리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며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망원경을 통해 북녘땅을 바라보고는 했다.
이제는 모두 옛날이야기가 됐다. 최근 곤돌라를 타고 민간인 통제구역 안쪽인 임진강 건너편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군이나 정부의 허가도 받을 필요가 없다. 남북 관계가 전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 상황에서 금강산 관광이 재개된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9월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 ‘평화 곤돌라’가 조용히 문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임진각 주차장 앞 철책선으로 막혀 있던 민간인 통제구역을 자유롭게 넘어 반대편까지 건너갈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임진각을 찾은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임진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독개다리나 평화누리공원·놀이공원 등을 떠올리지만 이번에 찾은 임진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 위로 쉼 없이 오가는 형형색색의 곤돌라였다. 이곳의 새로운 명물이 될 ‘평화 곤돌라’다. 국내 최초로 민간인 통제구역을 연결하는 왕복 1.7㎞ 길이의 이 곤돌라는 임진각 주차장에서 임진강을 넘어 캠프그리브스의 상부 정류장까지를 오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일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으로만 알았던 임진강 위를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에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게 할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다.
1층에서 탑승권을 끊고, 곤돌라를 타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갔다. 실향민들이 고령임을 배려한 것인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다. 탑승하기 전에 군부대에서 나와 신원 확인 등의 절차를 진행할 것 같지만, 탑승장에는 안내 요원 외에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평일이라 그런지 대기 인원이 없어 빨강·주황·노랑·초록 등 다양한 색상의 곤돌라를 골라 타는 여유까지 누릴 수 있었다. 잠시 멈칫하는 사이 몇 대의 곤돌라가 지나가고, 탑승할 순간이 찾아왔다. ‘짜릿한 걸 좋아하시면 회색 곤돌라를 타보시라’는 안내 요원의 권유에 따라 회색 곤돌라에 올라탔더니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화 유리다. 전체 26대 가운데 딱 9대밖에 없다고 한다.
출발 직후 안내 방송으로 “이제부터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말이 흘러나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로 철책선을 지나 임진강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오른쪽으로는 개성공단 관계자들이 북으로 오가던 통일대교가 여전히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고, 왼쪽으로는 폭격으로 끊어진 경의선 철교 독개다리가 북쪽을 향하고 덩그러니 서 있다. 곤돌라를 타고 북쪽 탑승장까지는 거리상으로 850m, 시간상으로 5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 70년간 군이나 정부 허가 없이는 넘을 수 없던 임진강을 자유롭게 넘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실향민이 아니라도 벅찬 감격의 순간이고, 가깝지만 닿을 수 없던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짜릿함을 안겨주는 경험이다.
순식간에 건너온 북쪽 탑승장은 남쪽과 마찬가지로 3층 건물이지만 추가로 옥상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곤돌라에서 하차해 한 층만 올라가면 쉼 없이 오가는 곤돌라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탑승장을 빠져나오면 사방이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펜스 뒤쪽으로는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현수막과 함께 ‘지뢰’ ‘미사일’이라고 적힌 생소한 안내판도 시야에 들어온다. 곤돌라를 타고 건너온 임진강 쪽도 철책으로 막혀 있다. 곤돌라를 타고 넘어온 이들 사이에서는 이곳이 ‘북한 땅이네’ ‘남한 땅이네’ 하는 언쟁이 오간다. 주소 상 북쪽 탑승장은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당연한 이야기지만 엄연히 남한 땅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개성까지는 불과 20㎞일 정도로 북한 땅이 코앞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바로 옆으로 남북출입사무소와 도라전망대·제3땅굴이 있으니 심리적으로도 북한과 지척 거리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여기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전망대길이다. 오르막을 따라 자갈길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지막한 언덕 위로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름이 ‘평화정’이다. 정자는 파란색 다리를 건너 넓은 데크로 연결되는 관문이다. 그 중간에 통과하는 다리 이름이 ‘도보다리’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밀담을 나눴던 ‘도보다리’를 본떠 만든 것으로, 남북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옆으로는 임진강 평화등대가 서 있는데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향하고 있다.
전망대에서는 임진각과 독개다리·경의중앙선·장단반도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날이 맑을 때는 멀리 북한산까지도 조망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쉽게도 북쪽은 산과 나무에 가려 볼 수 없지만 처음으로 북쪽에서 남쪽 땅을 바라보는 기분이 색다르다. 수십 년간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사실 곤돌라는 4월 처음 개장했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한동안 북쪽 탑승장에 내리지 않는 방식으로만 운영됐다. 이제는 북쪽 탑승장에 내려 몇 시간이고 머물러도 되지만 일몰·일출을 기준으로 운영되고 있고 운영 업체 측이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을 체크하고 있으니 해 질 녘 노을을 보기는 어렵다.
파주시는 북쪽 탑승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미군 반환 기지 캠프그리브스와 연계한 안보 관광 상품으로 곤돌라를 개발했다. 캠프그리브스는 1953년부터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 라이언이 소속된 미 8군 2사단 506보병대대가 머물던 미군 기지다. 2007년 반환 이후에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처음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해 민간인을 위한 평화 안보 체험 시설로 전시관·유스호스텔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곤돌라를 타고 넘어가 캠프그리브스까지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볼거리는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곤돌라를 타기 위해서는 꼭 신분증(학생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얼마 전 서울~문산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서울에서 임진각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 이상이나 단축됐다. /글·사진(파주)=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