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이제 건설의 시대를 넘어 ‘건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지방자치단체의 관련 정책이나 사회 인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박인석(61·사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서울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은 ‘건설’이라고 하면 댐·항만·도로 또는 아파트 같은 대형 토목건축을 떠올리기 마련”이라며 “하지만 실제로 보면 댐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이 전체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수준이며 ‘건축’이 차지하는 비중은 69%에 달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동네 건축’을 강조했다. 동네, 즉 우리 주변에서 건립되는 소규모 건축이 건축 산업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이 동네 건축 활성화가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 기관으로 각종 건축 정책에 대해 자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박 위원장은 지난 5월 19일 출범한 6기 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담=이종배 건설부동산부장 ljb@sedaily.com
<절대다수 차지하는 동네 건축>
명지대 건축대학 학장이기도 한 박 위원장이 어떻게 보면 남들이 외면하기 쉬운 동네 건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2018년 기준 대한민국 건설 기성액은 총 293조 원 규모에 달한다. 이는 자동차 산업보다 크고 전자 산업과 맞먹는 규모”라며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거대 토목공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동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규모 건축들이 점유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세부적인 설명도 이어졌다. 박 위원장은 “우리 사회에 지어지는 건축물은 연평균 21만 개 정도 된다”며 “그중 93%가량이 연면적 1,000㎡ 이하이고 다가구·다세대주택 규모인 660㎡ 이하 건축물이 88%를 차지한다”고 했다. 또 “건축이라 하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같은 거대 규모의 건축물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연간 건축되는 건축물 개수로는 전체의 90%, 총면적으로 봐도 절반 수준이 소규모 건축”이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 사회의 건설 산업은 건축이, 그리고 건축 중에서도 ‘소규모 건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정책이나 인식은 대규모 토목·건설에 치중돼 있다는 것이다.
<멋진 공공건축물이 동네 환경 변화시켜>
그렇다면 동네 건축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는 이를 위해서는 ‘공공 건축’부터 질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공공 건축의 질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인근에 지어지는 민간 건축의 질도 향상되고, 동네 전체의 환경이 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동네에서 멋진 파출소, 아름다운 우체국을 본 적이 있느냐”며 “보석 같은 공공 건축물이 동네 곳곳에 들어서면 민간 건축물들도 자연스럽게 설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동네 공공 건축물 설계의 질이 낮은 원인으로 ‘입찰’ 과정의 문제를 꼽았다. 박 위원장은 “좋은 설계안을 뽑는 것이 아니라 가격으로 입찰하다 보니 설계자들이 설계를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며 “설계는 최소 비용으로 하고 계속 응찰만 하는 방식이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 만연한 관행 또한 문제였다. 지역개발 사업에서 마을 계획, 마을 회관 설계까지도 한 업체가 도맡아 하다 보니 소규모 건축물 설계는 주로 하도급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간 소규모 건축물 설계는 ‘질’보다는 ‘가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동네 곳곳에 ‘이상한 건축물’들만 들어서게 됐다는 것이 박 위원장의 설명이다.
<설계 발주제도 등 제도 개선 필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좋은 설계자를 찾기 위한 ‘설계발주제도’를 제시했다. 현재 설계비 1억 원을 넘기는 건축물은 설계 공모가 의무화됐지만 이를 제외하면 상당수가 여전히 가격 입찰로 진행되고 있다. 박 위원장은 “질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안은 좋은 설계자에게 설계를 맡기는 것”이라며 “현재 서울시에서는 작은 건축물에 대해서도 설계 공모전을 의무화하고 총괄건축가제도 등을 도입해 동네 건축의 질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현재 3,000만 원짜리 소규모 공공 건축물도 공모를 통해 설계자를 가린다.
이 같은 관행이 서울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경북 영주시를 ‘귀중한 사례’로 꼽았다. “서울은 재정이나 규모 면에서 워낙 거대하다 보니 지방 소도시들이 벤치마킹하기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며 “반면 영주는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총괄 건축가를 통한 지역 건축물 관리, 소규모 건축물을 대상으로 한 설계 공모전 도입 등으로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공공 기관 또한 건축물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박 위원장은 “전국에 있는 파출소·우체국은 지자체가 아닌 경찰청·우정사업본부 등 각 기관이 맡고 있다”며 “전국에 명품 파출소, 보석 같은 우체국들이 세워진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즐거울 것”이라고 했다.
<정취 있는 골목 풍경 고민해야>
박 위원장은 “파리·베니스 등 유럽 중세도시들에 가면 사람들은 에펠탑 같은 거대 건축물보다 골목골목의 건물·가게들이 정성스럽게, 또 ‘견실하게’ 가꿔져 있는 모습에 놀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도 삼청동 등 명소 골목들이 생기고 있고 이러한 ‘정취’를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며 “골목과 건축물 하나하나가 관리가 잘되는, ‘정취 있는’ 골목 풍경에 대해 고민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동네 건축의 생산과 관리 주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박 위원장은 “소규모 건축은 단순히 건축물이라는 결과적인 ‘공간의 형태’가 소규모라는 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것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주체도 소규모·풀뿌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설계·시공·관리 등 소규모 주체를 육성하는 역할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의 공공 기관이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LH·SH가 1,000가구 규모 대단지 등 주택을 ‘공급’하는 기관이었다면 이제는 20~30가구짜리 소규모 단지를 설계·시공·관리하는 수백 개 업체들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그래야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고 이것이 건축 정책과 맞닿아 있는 우리 사회의 과제”라고 말했다. /정리=권혁준기자 awlkwon@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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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서울 △휘문고 △서울대 건축학 △서울대 건축학 박사 △1986년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 △1995년~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 △2018년~ 명지대 건축대학 학장 △2018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정책조정분과위원장 △2020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