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왕실모독죄

,jh



세종이 재위 24년 음력 3월 이천에 온천 휴양을 가려고 새 가마에 올랐을 때 지붕이 우지끈하며 푹석 내려앉았다. 임금은 별 탈이 없었지만 “장영실을 탄핵해야 한다. 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중신들의 주장이 빗발쳤다. 결국 가마 제작의 감독을 맡았던 노비 출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불경죄는 군주나 국가, 신 또는 이에 가까운 인물의 명예와 존엄을 해치는 행위를 했을 때 씌워지는 죄명으로 그 역사가 깊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명의 하나도 불경죄다. 당시 권력자는 소크라테스가 반대 정치가들 편에 섰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배심원들이 유죄로 판결해 형이 집행됐다.


불경죄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권위주의 국가에 남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국왕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테러방지법에 규정돼 있다. 터키에서도 국부로 평가받는 케말 아타튀르크나 민족·국가를 공공장소에서 모독할 경우 징역 6개월에서 2년까지 처할 수 있도록 형법으로 규정했다. 우리나라도 ‘국가모독죄’를 형법에 둔 적이 있으나 1988년 여야 4당 합의로 이를 폐지했다.

관련기사



최근 태국 정부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왕실모독죄’를 적용하자 유엔이 우려를 표명했다. 유엔 고등인권판무관실(OHCHR)은 “태국 정부가 최소 35명을 왕실모독죄로 기소한 조치에 충격받았다”며 불경죄 적용 중단을 촉구했다. 권위주의 국가들이 불경죄를 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정권 흔들기를 막으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우리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막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강행 처리해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의회 산하 초당적 기구인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가 내년 초 대북전단금지법과 관련한 청문회를 열기로 한 가운데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도 한국 정부에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촛불로 들어선 ‘민주 정부’임을 자찬해온 문재인 정부가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낳는 법안을 굳이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는지 곰곰이 자문해봤으면 한다.

/오현환 논설위원

오현환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