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이 강간을 당했다. 피해 사실에 괴로워하며 화장실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괜찮다”고 답했다. 남자는 그녀를 상대로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질렀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한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1·2심 재판부는 ‘괜찮다’는 말은 성관계 요구에 대한 동의와 같다며 무죄 처분을 내렸고 여고생은 무고 위기에 몰렸다. 대법원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사건은 2014년 발생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A양은 지인 2명과 함께 지인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참석자들이 모두 만취했을 무렵 그녀는 화장실에서 함께 술을 마신 B씨에게 강제로 성폭력을 당했다. 충격을 받은 A양은 사고 후 화장실에 앉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같은 곳에 있던 C씨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는 위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A양은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괜찮다”는 답을 했다. 돌아온 것은 악몽의 재시작이었다. C씨는 A양에게 같은 범죄를 한 번 더 저질렀다.
성폭행을 두 번 연속으로 당한 A양은 사고 당시 선명한 대처를 하기가 힘들었다. 당일 술자리가 끝난 뒤 C씨는 A양을 집에 데려다 주고 문 앞에서 키스를 하면서 호감을 표시했다. 이후 A양은 문자로 C씨에게 “당신은 (B씨를) 말리지 않았고 나는 원치 않는 성관계를 당한 성폭행 피해자가 됐네요”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A양이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였음을 인지하고 대응한 것은 시간이 지난 후 였다. 2017년 A양은 B씨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오자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았고 사과를 받아야겠다며 C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당시 군인이었던 C씨는 사과할 생각이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갈등은 법정으로 가게 된다.
사건이 발생하고 상당 시간이 흐른 후라 법원이 유무죄 판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2심에서는 A양이 당시 한 ‘괜찮다’는 말이 족쇄가 됐다. C씨는 당시 B씨가 A양을 강간한 정황을 몰랐다며 자신은 용변이 마려워 들어간 화장실에서 A양에 호감을 표했고 상대가 응해 간음을 한 것 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그들이 술을 마신 집이 넓지 않은 곳이라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한 B씨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A양이 직접 ‘괜찮다’는 말을 한 것을 근거로 C씨에 대한 무죄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A양은 “스스로가 강간의 피해자가 되는 부분이 가장 무서웠던 것 같고 강간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그냥 무슨 대답이든 괜찮다고 했던 것 같다”며 “당시에는 내가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을 원심을 뒤집고 C씨에 대한 유죄를 선고했다. ‘괜찮다’는 말과 별개로 당시 C씨의 행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 근거가 됐다. 대법원은 “화장실에 알몸으로 있는 피해자에게 구조 등을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괜찮은지 물어 본 후 호감이 있다면서 성행위를 해도 되는지 동의를 구했다는 것은 진술 내용 자체로도 모순되고 경험칙상으로도 이례적이라고 보인다”고 지적했다.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C씨의 행위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A양이 한 ‘괜찮다’는 말의 맥락도 다르게 파악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해자가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구토를 할 정도로 상당히 취한 상태였으며 B씨로부터 강간을 당한 직후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 일부를 기억 못한다고 해도 진술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된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판결 사실이 알려진 후 사건 내용보다 원심 결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원심 재판부가 이미 강간을 당해 정신이 혼미한 미성년자의 “괜찮다”는 말을 성행위 동의로 해석했다는 사실이 충격을 준 것이다. ‘미투’ 이후 각종 성추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달라지고 있다. 보수적인 판결을 자주 내리는 법원 역시도 이러한 변화에 동참해야 할 때다.